그들은 왜 소통을 거부하고 벽이 되어가나?

그들은 왜 소통을 거부하고 벽이 되어가나?

사실상 관계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혼자서 살 수는 없다는 말이 맞다면, 어떤 식으로든 관계는 맺어질 것이다. 평균적으로 볼 때는 대인 관계가 없어 보이는 사람조차도 주변의 누군가와 관계를 맺거나 하다못해 동물, 식물, 물건들과도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경우에 따라선 미물들이 사람보다 더 중요하게 받아들여진다. 소통을 절대적으로 거부한 것처럼 보였던 바틀비(Bartleby)조차 사실은 가장 강렬한 관계 속에 있었다. 고독도 하나의 관계이다. 결국 문제는 관계의 방식, 즉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이다.

모임이나 조직 안에서 주변으로 밀려나거나 배제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집단의 성격을 알 수가 있다. 관계의 실상은 집단 내 정상적인 구성원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에 의해 폭로되기 마련이다. 집단의 치부들, 폭력, 강요, 추행, 권력은 정상적인 구성원들을 통해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정상이란 묵인이나 동의에 대한 도덕적 보상일 뿐이다. 동의하지 않고 적응하지 못하는 비정상이 출현했을 때가 되어서야 집단은 자신의 실체를 드러낸다. 비정상은 유별난 성격이나 나쁜 인성이 아니라 이의 제기이다.

예컨대 이런 관계에 대한 이의제기: 구성원에게 굴욕을 강요하거나, 말을 안 들으면 크든 적든 모욕과 보복을 가하거나, 상관이나 선배는 자기들이 살아온 굴욕의 길을 자연으로 받아들이며 후배들에게도 그런 길을 권하면서 부당을 대물림 하거나, 따르지 않으면 인성이나 성격을 운운하며 따돌리고 뒤에서 욕을 하고 평판이라는 이름으로 집단에서 매장을 시키거나, 등등

이러한 풍조들이 한국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집단적 계급 정동이다. 무의식적이고, 미세하고, 식별할 수 없을 만큼 미시적인 강도로 일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력과 비하와 갑질들이 정상으로서 묵인되고 있는 것이다.

정상에 대한 또 다른 정의: 식별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평균적인 것 만이 선하다.

미시적인 수준에서 일어나는 “정동적 권력”은 당해 본 사람만 식별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주파수 같은 것이라서, 그 대역에 있지 않거나 세심하게 tuning하지 않으면 감지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정동적 권력 관계가 사방으로 만연되어 시끄러워 견딜 수 없울 만큼 우리 모두가 주파수 대역에 들어와 있는데도, 오히려 너무 강렬하고 지나쳐서 얼얼해서 무뎌진건가, 대부분이 그것을 정상으로 옹립하면서 뭔가를 새롭게 하기 보다는 그냥 다니던 모임이나 조직으로 쭈뼛거리며 매일 아침 그 자리로 귀환하고 만다. 그리고 견딜 수가 없어 정상화가 되지 않은 몇몇은 소통을 거부하고 벽이 되어간다.

권력이란 언제나 집단적인 것이다. 개인의 권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폭로되어야 할 것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 즉  공모여야 한다.

그들은 왜 소통을 거부하고 벽이 되어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