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destination: 자본과 무협극

Predestination: 자본과 무협극

SF 무협물 『타임 패러독스』(Predestination)라는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이것은 비유적으로 쓴 줄거리가 아니라 실제의 줄거리이다.

나는 나movie_image (2)와 결혼해서 나를 낳고 나를 고아원에 보낸다. 고아원에서 자란 나는 공부도 잘하고 싸움도 잘해서 능력을 인정받아 어떤 비밀기관에 발탁되어 연수를 받는다. 그러나 병원 검사에서 나는 여성인 내 안에 남성의 내가 있는 양성 판정을 받아 선발되지 못한다. 점점 남성이 되어가는 나는 어느 집 가정부로 일하다가 잡지에 기고한 글로 작가가 되어 살면서, 성 전환 수술과 행태 전환으로 남자가 된다. 그러다가 어느 바에서 우연히 나를 만난다. 나는 테러범인 나를 쫓고 있는 나의 후임자가 되어 시간 여행을 하며 테러범인 나를 검거하는 임무를 맡아 수 년간 나를 쫓아다닌다. 그러다가 어느날 테러범인 나에게 당해 얼굴이 불에 타는 사고를 겪는다. 그러나 새로운 얼굴로 재수술을 하는데 성공하여, 터프한 카우보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나는 다시 나를 쫓기 위해 내가 잠복근무 하는 어느 바에서 성전환 수술을 하고 작가로 살고 있는 나를 만나 나를 내 후임자로 키우고, 나는 나를 쫓는 일에서 은퇴했지만 내 인생을 망쳐놓은 나에게 분노를 느끼고 고독에 휩싸여 도시 테러범이 되어 도시를 폭파하며 살아간다. 그러다가 어느 세탁소에서 내가 후임자로 키운 나에게 잡혀 내가 쏜 총에 맞아 죽는다. 테러범인 나를 죽인 나는 결국 테러범인 나를 죽인 공로를 인정받아 또 다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출근을 한다. 출근처는 내가 양성이기 때문에 나를 선발하지 않았던 바로 그 기관이었고, 나의 선임자였던 나는 바로 이 기관의 에이스 요원이었던 것이다.

미국인들은 왜 이러한 “과학기술만능주의 묵시론 영화들”을 만드는 것일까? 시간을 주제로 하는 대부분의 미국 영화들은 “타임머신”이라는 “근두운”(雲)을 타고 시공간을 휘젓고 싶어하는 중국인들의 “무협 열망”과 무관하지 않은 방식으로 시간을 다룬다. 최근에 인기를 끌었던 『인터스텔라』(Interstella) 역시 “과학기술만능주의적 무협 열망”을 반영한다.(모르긴 몰라도 과학제국주의 열망의 한 증후처럼 보인다) 『인터스텔라』가 다른 과학 무협과 다른 점이 있다면 과학담론을 직접 언급함으로써, 무협을 환상이나 상상이 아니라 보다 객관적 착시현상 즉 환각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지아 장커(Jia Jang khe)가 ‘자본’을 ‘무협’으로 다룸으로써 자본의 무협스러운 본질을 폭로했다면,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은 ‘과학’을 ‘무협’으로 다룸으로써, 아니 ‘무협’을 ‘과학’으로 다룸으로써, 과학의 무협스러운 본질을 고발한 것인지 아니면 무협을 과학화 했는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과학과 무협을 식별불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아 장커와 크리스토퍼 놀란은 전혀 다른 계열에 속하는 감독들이다.

『타임 패러독스』에서 다룬 시간의 “모순”(역설이 아니다. 이 영화는 제목을 『타임모순』으로 했다면 힛트 치지 않았을까?)은 다음과 같은 뿌리깊은 철학적 물리학적 혼동에 기인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10년 전의 “나”와 4년 전의 “나”가 다른 존재라는 아이디어를 확대해석 하면 이들이 모두 물리적으로 “분리된 존재”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나는 하나의 “점”이며, 이 점들의 모임이 바로 단일한 하나로서의 나의 시간이자 역사이다. 따라서 이 점들은 얼마든지 그 순서를 바꿀 수가 있으며, 결합도 할 수 있고, 서로 만나서 싸울 수도 있고, 결혼도 할 수 있고, 또 다른 나와 섹스를 하고 또 다른 점으로서의 나를 탄생시킬 수도 있다. 나는 하나의 “점”이며, “구역”이며, “공간”이다. 나는 살아가면서 그 점과 구역들 하나 하나를 마치 수만 수천 수조개의 방을 통과하듯이 옮겨 다닌다(『인터스텔라』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무한한 방들 처럼). 나는 공간으로 환생한 시간이며, 지속이며, 존재이다. 바로 이 “생성과 변화의 공간화”로 인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본성적으로 다르지 않은 나의 공간적 존재들은 마치 ‘레고블럭’처럼, 자본의 망상이 과학담론으로 정당화되어, 이렇게도 조합되고, 저렇게도 조합될 수 있는 영원한 “기능”(function)의 요소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본이 가장 희망하는 “인간관”이다.

들뢰즈(G. Deleuze)는 어디선가, “오독(誤讀)에는 항상 정치적 냄새가 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혼동”은 항상 그것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를 배후로 품는다. 설령, 그 배후를 대놓고 비판하는 경우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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