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수적 통분:무리수적인 것=고전영화:현대영화

유리수적 통분:무리수적인 것=고전영화:현대영화


“때로 소위 유리수적 약분은 자신이 분리하는 두 집합 중의 하나에 속하게 되는데(하나의 끝, 혹은 다른 것의 시작), 이것이 ‘고전적인’ 영화의 경우라 할 수 있다[매치편집]. 그러나 때로 현대영화에서처럼 절단은 틈새가 되어, 즉 무리수적인 것이 되어, 집합의 어느 한 쪽이 시작이 되고 다른 한쪽이 끝이 되는 것과 같이, 이 절단이 어느 한 쪽에 속하게 되는 일이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된다. 거짓 매치란 바로 이러한 무리수적 절단이다.”(354)

수학에서의 유리수적 통분과 무리수적인것 의 차이는 고전영화와 현대영화의 차이와 같다.

요약: 유리수적 약분-고전영화-매치편집 / 무리수적인 것-현대영화-비매치편집

영화에 있어 대립은 연속적인 것과 불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Tout)의 변화에 따라 이들을 조정하는 서로 다른 두 방식이 있을 뿐이다.

“전체가 시간의 간접적 재현인 한, 연속적인 것은 유리수적인 점들의 형태로, 그리고 공약 가능한 관계를 통해 불연속적인 것과 화해하게 된다. [. . .] 그러나 전체가 틈새를 통과하는 바깥의 역량이 될 때, 전체는 시간의 직접적인 현시가 되거나 혹은 비-연대기적 시간과의 관계 속에서 일련의 무리수적인 점들과 화해하는 연속성이 된다. [. . .] 이런 의미에서 몽타주는 직접적 시간 이미지 내에서의 관계를 결정하고, 단속적인 이미지와 플랑-세캉스를 화해시키면서 전혀 새로운 의미를 띄게 되는 것이다.[바쟁이 말했듯이 플랑-세캉스 내의 몽타주 같은?] 우리는 이미 사유의 역량은 여기서 사유 안의 비사유, 사유에 고유한 무리수적인 점, 즉 외부세계를 넘어선, 그러나 우리에게 세계에 대한 믿음을 다시 부여할 수 잇는 바깥의 지점에 자리를 내어준다는 것을 보았다.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영화가 우리에게 세계에 대한 환상을 주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영화가 우리에게 세계에 대한 믿음을 다시 줄 것인가이다. 이 무리수적 지점, 이것이 바로 웰스의 환기할 수 없음(ine’vocable), 로브-그리예의 설명할 수 없음(inexplicable), 레네의 결정할 수 없음(inde’cidable),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불가능함(impossible), 혹은 고다르의 (두 사물 사이의) 공약 불가능함(incommensurable)이다.”(355) [ ] 표시는 나의 각주임. (현대영화 분석한 초입 부분에 비매치 편집에 관한 소개가 약간 나오는데, 그 부분에 이 노트를 각주로 편집할 것)

유리수적 통분:무리수적인 것=고전영화:현대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