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와 테크놀로지

독서와 테크놀로지

최근에 학부생들에게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잘 알려진 논문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을 읽히고 있다. 이 텍스트 말고도 학부생이 읽기에는 다소 버겁다 싶은 텍스트를 여러 개 선별해 놓은 상태이다. 어떤 점에서 이 시도는 모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발표자를 비롯해서 여러 학생들이 읽는 가운데 어려움을 호소한다. 글의 이해를 위해 마르크스(Karl Marx)나 미학 전반에 관한 배경지식을 필요로 하는 그 내용은 고사하고, 영문 해석조차 버거워 하는 것 같다.

수년 전부터 느끼고 있는 징후가 하나 있는데, 학생들의 독서 능력이 가파르게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식의 문제이기도 하고, 또 언어(모국어, 외국어)를 처리하는 기술적 수준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텍스트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벤야민이 자신의 글에서 그렇게 썼듯이, 현대의 기술매체가 젊은 학생들의 지각패턴을 급속도로 바꾸어 놓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대상이나 이미지에 오랫동안 머물지 못하는 이 신 인류학적 지각 패턴의 문제는 점차 독서가 불가능해지고 있는 상황으로 치닫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벤야민은 기술복제라고 하는 사회 역사적 환경이 “현대적 위기”를 반영하고 있는 동시에, 그와는 반대로 낡은 이데올로기들 즉 마르크스식으로 말해 신비적 외피를 “청산”해 줄지도 모를 것이라고 아주 “모호하게” 믿고 있었다. 물론 정치적인 입장에서 보면 있을 수 있는 믿음이다. 확실히 테크놀로지는 새로운 지각을 탄생시켰고, 그 지각은 낡은 가치들을 낯설게–너무나 낯설어서 비판적이 되기 보다는 오히려 혐오의 감정이 들게 하는–바라보기 시작했고, 그럼으로써 신비적 외피에 감싸여 몽롱한 미학적 분위기에 취해 있었던 서구인이 그리고 최근엔 동양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편, 벤야민 자신이 지적했던 그 위기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도 알고 있던 바, 존재와 사물로부터 “실질적 지속”(substantive duration)이 제거되는 문제, 다시 말해 어떤 실제적 존재가 태어나서 그 자신의 고유한 시간(역사성)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 서서히 축적되어 그의 실질적 존재성을 증언해 줄 수 있는 “증언적 가치”(testimonial value)가 그 존재로부터 제거 되는 문제는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존재를 증언해주고, 그것의 긍정성을 확보해주고, 궁극적으로 존재의 본질을 보존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 실질적 지속이다. 그리고 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그 실질적 지속이 윤리적 판단의 근거로서 유효할 수 있도록, 그것을 현시하는 능력이 바로 독서(reading)가 아닌가? 벤야민이 이 사실을 감안하여 말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현대적 테크놀로지가 사람들의 지각에 끼친 영향은 낡아빠진 상부구조를 청산할 수 있는 정치적 가능성 보다는, 오히려 독서능력의 박탈이 더 크지 않을까 싶다. 새로운 형태의 독서 테크놀로지가 있다는 말일까? 아니면 독서를 하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 있다는 말일까?

그 어느 때 보다도 독서가 필요한 시대이다. 냉소적이 되어가는 정서를 바로잡기 위해. 그리고 더 본질적으로는 빼앗긴 시간을 되찾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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