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ul Ricoeur의 <시간과 이야기>에서 발췌

Paul Ricoeur의 <시간과 이야기>에서 발췌

시간과 이야기 1

폴 리쾨르 / 김한식, 이경래 옮김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03)

  • 서문 및 소개 부분은 Note 9, (1)에 정리해 놓았으니 옮겨 적을 것

제 1 장 시간 경험의 아포리아

–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제11서

(1) 인간 정신의 두 가지 특징

정신의 긴장(intentio, 의도적으로 의식을 집중하는 것)과 이완(distentio는 연장, 팽창의 뜻도 아울러 지니고 있다) 혹은 아리스토 텔레스의 구분에 따라 뮈토스(muthos)와 극적반전(peripeteia)

(2) 리쾨르의 지적 사항

“시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아우구스의 질문은 그가 했던 영원성과 시간의 관계에 대한 사색에 폭력을 가하게 된 것. => 영원성과 시간을 분리시켜서 시간이 독립적으로 서렴ㅇ되기를 원하는 것이므로. 따라서 “그는 시간을 다루면서 오로지 인간의 시간을 특징짓는 존재론적 결함을 보다 뚜렷하게 드러내기 위한 목적에서 영원성을 전거로 삼고 있으며, 시간 그 자체의 개념을 괴롭히는 논리적 모순들과 직접 맞서고 있다.”(29) => 그래서 리쾨르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마지막 부분에 영원성에 대한 사색을 다시 도입하는데, 그 목적은 “바로 영원성에서 시간 경험의 강화된 모습을 찾기 위해서이다.”(29)

2. 영원성과는 무관하게 시간만을 문제삼아(정신의 이완과 긴장, 뮈토스와 극적반전의 의 대조를 통해) 분석하는 이 방법론적 작위는 오히려 모순적 결과를 초래. => 즉 시간에 관한 오히려 탁월한 이론이 성립된다는 점.
“아우구스티누스는 항상 전통에 의해 수용된 아포리아들에 입각하여 논의를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매번 아포리아를 해결할 때마다 끊임없이 연구에 활력을 주는 새로운 난점들을 만들어 낸다.”(30)

즉, 영원성에 입각하여 아우구스는 시간의 역설, 모순, 난점, 아포리아를 통해 시간의 존재론적 결함을 찾으려는 과정에서,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입장을 들락 달락하는 것이다.

1. 시간의 존재와 비존재의 논리적 모순

(1) 시간의 존재에 관한 회의주의적 추론과 경험의 모순

“회의주의적 추론은,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며 현재는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시간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다가올 일은 존재할 것이고 지나간 일은 존재했으며 현재의 일은 지나가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마치 시간이 실재하는 것처럼 말한다. 지나가는 것이라 할지라도 무(無)는 아니다.”(33)

시간이 존재한다는 점을 정당화하는 것이 바로 “언어의 용법”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간에 대해 말을 하고, 또 그 질서에 따라 언어를 쓰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간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확실히 이해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이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을 때에도 우리는 이해한다.”(33, 아우구스 재인용)

그렇다면 시간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시간이 “무엇”인지의 문제와 “어떻게”의 문제는 다른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이렇게 말한다.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나에게 그 질문을 하지 않을 때에는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 나에게 그것을 묻고 내가 그것을 설명하려 한다면 나는 더 이상 알 수 없다.”(34, 재인용)

따라서 문제는, “지나갔다”, “닥쳐오다”, “존재하다”의 동사와 “이미 ~ 아니다”, “아직 ~ 아니다”, “항상 ~ 아니다”의 부사를 어떻게 화해 시킬 것인가?

마찬가지로, 시간의 존재에 관한 질문은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 같은 선상에 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측정할 수 없으며, 측정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그 존재 양태(“어떻게?)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 시간이 길다 혹은 짧다라고 말한다. 또 “우리는 미래에 관해 그것이 줄어든다고, 그리고 과거에 대해 그것이 늘어난다고” 말한다. 그러나 “언어는 단지 측정 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데 그침으로써”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와 같은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2) 현재를 이해하는 잘못된 관점

리쾨르는 아우구스의 문제가 바로 현재를 단 하나의 것으로 생각했다는 데 있음을 지적한다. “현재를 단지 머무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연장도 갖지 않는 개념으로 정제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현재를 순간으로 정의하면, 결국 그것은 공허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시간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와 미래가 되고, 결국 지나가버리고 없는, 혹은 아직 오지 않은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 되는 것이다. 시간은 결국 회의론자들의 주장처럼 비-존재가 된다. (여기서 한가지 지적할 점은, 아우구스의 시간론은 철저하게 “현재”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가 존재하는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말이다. 비록, 현재를 부정하는 동안에도, 결국 현재를 현존시키기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회의론자들의 견해를 따라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려야 한다. ‘순간의 단편이 아무리 미세하다 할지라도 더 이상 그것으로 나누어질 수 없는 시간의 어떤 성분을 우리가 인지 할 수 잇다면, 그것이 바로 현재라 불려질 수 있을 것이다. [… ] 그러나 현재는 공간(spatium)을 가지고 있지 않다.”(36, 재인용)

그럼에도 우리는 회의론자들을 믿지 않는다. 왜? 언어를 통해 말을 하고, 경험적으로 이해를 하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은 바로 이 부분을 선택해서 이를 기준으로 설명한 것이다)

“여전히, 그리고 언제나 언어를 통해 진술되고 이해력에 의해 밝혀지는 경험이다. “그런데 주여, 우리는 시간의 간격을 지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서로 비교하여 어떤 것은 길고 어떤 것은 짧다고 부릅니다. 우리는 또 이 시간이 저 시간보다 얼마나 길고 짧은지 재어보기까지 합니다.”(36-37, 재인용)

결국, 시간의 비-존재를 주장하는 회의론은 우리의 경험, 즉 지각하고 비교하고 측정하는 우리의 실천활동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는 지각하고 비교하고 측정하는가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여기서 바로 이론의 동기가 나온다. (참고로, 경험에 대해 명증한 논리로 설명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이론을 한다. 그러나 회의론자들, 즉 서구의 전통은 그 경험을 부정하는 것으로 정당화한다. 경험이 오히려 가짜(오류, 기만)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3) 현재는 순간이 아니라 이행이며 전이라고 하는 개념을 통해 해결하려 함

리쾨르의 최종적인 생각은 현재를 정신의 이완(존재론적 긍정이다)으로 생각하지 않는 한, 결코 시간의 모순은 해결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즉 그의 말은 “세 개의 현재[다가올 현재, 지나가는 현재, 지나간 현재] 사이의 변증법에 의한 이완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또 결국은 이것이 아우구스의 최종 지점인데, 아직까지는 이에 대한 얘기가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을 계속해서 지적한다. 현재가 이행이며 전이라고 하는 개념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지만, 리쾨르는 이 조차도 아직은 부족한 개념이기 때문에,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즉, “기대, 기억 그리고 주의력 사이에서 이완된 관계라는 관념을 형성하지 못하는 한”, 아무리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그것을 관찰하여 측정”할 수 있으며, “흘러가는 순간이 지각되고 측정될 수 있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여전히 우리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흘러가는 순간을 지각하고 측정할 수 잇다고 해도, 여전히 시간이 설명된 것은 아니며, 시간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충분히 해명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시간의 정신의 문제이고, 우리의 주관성의 문제라면, 여전히 그 해답은 우리를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는 말이 아닐까?)

(4) 시간(과거와 미래)의 존재 권리를 정당화하는 근거: 이야기, 예측

현재에 대해 그 존재 권리는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그에 관해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잇는데, 그렇다면 과거와 미래는 어떠한가?

“우리는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을 이야기하며, 예상했던 대로 일어나는 사건들을 예측한다. 따라서 회의론자들의 공격에도 언제나 잘 버티는 것은 언어와 경험, 그리고 경험이 진술하는 행동이다. 그런데 예측한다는 것은 예견한다는 것이며, 이야기한다는 것은 ‘정신을 통해 인지하는cernere’ 것이다… . 이리하여 회의주의적 추론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따라서 미래의 일과 과거의 일이 존재한다’라고 결론을 내린다.”(38)

이렇게 해서 리쾨르는 아루구스의 텍스트가 이제부터는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과거의(praeterita)” 그리고 “미래의(futura)”라는 형용사로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즉, 과거와 미래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와 예측이라는 현재적 행위를 통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기실 우리가 기꺼이 존재로 간주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의 과거와 미래가 아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이야기하거나 예측할 때 언급되는 일들이 아직도 존재하지 않거나 이미 존재하고 있지 않고서도 현재 속에 존재할 수 있는 시간적인 자질들이다.”(39)

그렇게 해서 리쾨르는 아우구스가 다음으로 세겹의 현재(정신의 이완)라는 개념에 도달하는 한 발을 내딛는다고 지적한다. 즉, 아우구스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만일 미래의 일과 과거의 일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나는 그것이 어디에 존재하는지 알고 싶다”(39, 재인용)

리쾨르는 이 질문이 결국 의도한 바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모든 “시간적 자질들을 정신 ‘속에’ 위치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그 위치는 바로 현재 속에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과거의”, “미래의”의 형용사와 결합되어, 이렇게 해서 현재가 내재적 다양성을 갖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현재, 즉 그 또한 과거의 praeterita와 미래의 futura와 연계되어, 그리고 내적인 다양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복수 형용사 praesentia로서의 현재다.”(40)

이렇게 해서, 현재가 다양성으로 정의되었다.

(5) 현재의 내재적 다양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미래와 과거가 현재 안에 있음을 설명하는 방식을 리쾨르는 이렇게 설명한다.

“서술 행위는 기억을 연루시키고, 예견은 기다림을 연루시킨다고 말할 수 있ㄷ. 그런데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과거의 이미지를 갖는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 이미지란 사건들이 남긴, 그리고 정신에 새겨진 어떤 흔적이기 때문이다.”(40)

즉, 과거는 현재의 기억 속에 있는 것인데, 기억이란 바로 과거의 사건이 남긴 잔상, 이미지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 혹은 예견은?

“예견도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 설명된다. 즉 미래의 일들이 다가올 것으로 우리에게 현전하는 것은 바로 현재의 기대 덕분이다. 우리에게는 그것을 ‘미리예고praenuntio’할 수 있게 하는 어떤 ‘전-지각 pre’-perception, praesensio’이 있다. 기대는 그처럼 기억과 유사관계에 놓인다. 그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사건에 선행한다는 의미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어떤 이미지로 구성된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지나간 일들이 남긴 흔적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미리 예상하고, 지각하고, 예고하고, 예측하고, 공표하는 미래의 일들에 대한 어떤 ‘기호’이며 ‘원인’이다.”

뒤에 가면, 과거와 관련이 있는 이미지는 “이미지-기억”, 미래와 관련이 있는 이미지는 “이미지-징조”라고 리쾨르는 부른다. 어쨌든 이미지가 현재적으로 공존하고 잇는 방식은 하나는 잔상으로, 또 하나는 기대 혹은 징조의 형태로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미래, 과거, 한 점의 현재도 아닌, 또 흘러가는 현재도 아닌, 전혀 다른 현재가 정의된다. 즉 “변증법적으로 확장된 현재 속에 기억과 기대를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이다.”(41) 이를 다르게 말하자면, 과거의 잔상과 미래의 기대가 서로 자기 쪽으로 당기고 있는 현재라고 말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그 본래의 의미로 세 개의 시간, 즉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실 이러한 세 가지 시간 양태는 어떤 방식으로 정신 속에 존재하며, 다른 곳에서 그것을 찾을 수는 없다”

“과거의 현재는 기억이며, 현재의 현재는 직관 vision, contuitus[나중에 우리는 이완과 더 좋은 대조를 이루는 용어인 긴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이며, 미래의 현재는 기다림이다.”

(6) 세 겹의 현재의 용어상의 설명

기억은 ‘아직adhuc’이라는 용어에, 그리고 기대는 ‘이미jam’라는 용어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두 용어들은 해결책을 보여줌과 동시에 또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흔적은 지금 존재하며, 다른 한편으로 그 흔적은 그런 이유로 기억 속에 ‘아직adhuc’ 존재하는 과거의 일과 관련을 맺는다. ‘아직’이라는 이 사소한 말은 논리적 모순의 해결책인 동시에 새로운 수수께끼의 근원이다. 즉 정신에 새겨져 현재의 것이 된 이미지-흔적 vestigia이 어떻게 동시에 과거와 ‘관련’될 수 있는가? 미래의 이미지도 유사한 어려움을 제기한다. 우리는 이미지-징조들이 ‘이미 존재한다 jam sunt”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이미 존재하는 것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이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nondum’ 미래의 일 그 자체를 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미’라는 말은 그 징조가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과 동시에 무엇을 예상하고 있다는 특성을 나타낸다. 사물이 ‘이미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징조를 통해 내가 미래의 사물을 미리 예고하고 예측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미래는 ‘미리 말해진다 ante dictatur.’ 그러므로 무엇을 예상하는 이미지는 흔적의 이미지만큼이나 불가사의하다.

즉, ‘아직’ 이라는 말에는 ‘현재에 있음’이라는 말과 ‘지나가고 없음’이라는 말이 함축되어 있고, ‘이미’라는 말에는 ‘현재 있음’과 ‘예상하고 있음’을 함축하고 있다. 전자의 경우는 현재속의 과거를, 후자는 현재속의 미래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질문. 세 겹의 현재가 다양성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과거, 미래 모두가 현재화 되어 본성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지 않은가? 세 겹의 현재란 말 그대로 현재의 다른 양태일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다양성이 아니다. 이것은 모순의 해결이 아니라, 중화일 뿐이다.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한 것이다.)

과거와 미래는 정신 속에 내재하고 있다. 즉 시간은 정신의 존재이다. 즉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통해, 그것이 준-공간성을 갖는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나 이것이 궁극적인 답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정신은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신 속에 새겨진 이미지-흔적과 이미지-징조의 준-공간성이야말로 미래와 과거의 일들의 위치에 대한 질문을 초래하는 것은 아닌가?”(44)

결국, 세 겹의 현재라는 개념이 시간의 아포리아를 해결하는 방법이 되려면, 시간을 측정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세겹의 현재는, 한 점에 국한된 현재에서 거부되었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연장을 정신 그 자체에 부여하게끔 하는 간극을 우리가 그러한 삼중성 자체 내에서 식별하지 못하는 한, 정신의 이완이라는 결정적 날인을 아직 얻지 못한 것이다. 준-공간적인 언어도 그 자체로서는 해겨로디지 않은 채로, … 시간이 정신에 내재한다는 것은, 시간을 물리적 운동에 종속시키려는 모든 명제를 논증을 통해 일단 제거시킴으로써만 그 완전한 의미를 획득한다… . 결국 ‘정신의 이완이라는 개념이 형성되기전까지는 확고한 보장을 받지 못한다.”(44)

여기서 말하는 정신의 이완이란 순간이 아니라 미래와 과거로 늘어난 것일 텐데, . . 삼중성의 현재와 정신의 이완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다른 것인가?

2. 시간의 측정

(1) 시간의 측정에 있어서의 모순

현재는 흘러가는 것이다. 또한 현재는 연장을 가지지 않는다. 흘러가는 것은 지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어디에서 어디를 거쳐 어디로 흘러가는가?”(45)라고 물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공간 속에서 흐르는 그 무엇이다. 그러나 그것은 연장을 가지지 않으므로, 완전한 형태의 공간은 아니다. “지나가다 transire”라는 용어가 이처럼 준-공간성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렇게 현재를 지나가는 이행으로 파악함으로써, “어떤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며, 시간적 간격 사이의 모든 관계는 ‘시간적 공간 spatia temporum’과 관련이 있음을 확인한다.” 그러나 다시 모순이 생긴다. 왜냐하면 “시간은 공간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는데, ‘우리는 공간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측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45).

(2) 우주론적 해결책과의 단절. 즉 시간을 전체의 운동으로부터 분리하기

“수수께끼를 풀려면 우주론적인 해결책은 피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오로지 정신 속에서, 그러니까 세 겹의 현재의 다양한 구조 속에서 연장과 측정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도록 연구를 제한할 수 있다. 따라서 시간과 천체의 운행, 그리고 일반적 운동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부수적인 것도 우회로도 아니다.”(46)

이렇게 해서 리쾨르는 네 가지의 논거를 제시하면서, 아우구스트가 시간을 (천체의)움직임으로부터 단절시킨 다음에야 비로소 이완의 개념에 도달할 수 있다고 적는다.

1. 천체의 운동이 시간이라면, 전체의 운동 역시 일종의 물체의 운동이므로, 일반 물체들의 운동 역시 시간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천체의 하나의 움직임 외에 물체 각자들의 다양한 시간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만일 천체의 운행이 시간이라면, 무엇 때문에 여타의 물체의 움직임에 관해서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이 논거는 천체의 움직임이 변할 수 있다는, 따라서 빨라질 수도 느려질 수도 있다는 주장을 예견하는데, … 이렇게 해서 천체는 옹기장이의 물레나 인간의 음성에 의한 음절의 장단과 같은, 여타의 움직이는 물체들과 같은 위치에 놓이게 된다.”(47)

2. 하나의 물체의 운동에 지나지 않으므로, 천체의 운동 역시 모든 운동의 척도가 될 수는 없다.

“만일 천체의 빛은 멈추고 옹기장이의 물레는 계속 회전한다면, 움직임이 아닌 다른 것으로 시간을 측정해야 할 것이다. 이 논거 역시 천체 운동의 불변성에 대한 주장이 흔들릴 수 있다고 가정한다.”(47)

3. 천체는 물체에 불과하므로, 그 자신의 움직임 자체가 시간이 될 수 없다.

“앞의 전제들은 천체가 시간을 나타내도록 운명지어진 조명기구에 불과하다는, 성서를 통해 얻은 확신을 담고 있다. 이리하여 지위가 격하되었다고 할 수 있는 천체는 자신의 움직임을 통해 시간을 구성할 수 없다.”(47)

4. 천체의 운동의 절대적 시간의 파괴, 전통으로부터 의 단절

“만일 태양이 더 빨리 회전하여 힌 시간 만에 일주한다면, 하루는 더 이상 태양의 움직임에 의해 측정되지 않을 것이다. 태양의 속도가 변할 수 있다는 가설로 말미암아 아우구스트가 모든 전통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 신은 창조주이기 대문에, 옹기장이가 자신의 물레의 속도나 또는 낭송자가 음절의 장단을 바꾸듯 천체의 속도를 바꿀 수 있다[여호수아가 해를 멈추게 한 구약성경 예 참조]… . 우주론을 언급하지 않고서도 시간적 공간–하루, 한 시간–에 관해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감히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 뿐이다. 정신의 이완이라는 개념은 바로 이러한 시간적 공간의 우주론적 지주의 대체개념으로 사용될 것이다.”(48)

그러니까, 시간을 천체의 운동과 혼동했던 전통적 시간론자들로부터 단절함으로써, 시간을 정신의 이완으로 이끌고간 것이 아우구스트의 의미이다. 그런데 희안한 논리이다. 신의 이름으로 모든 자연 현상의 절대성을 파괴하고 상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즉 신의 역설인데, . . 오로지 “신”만이 절대이고 나머지는 그러므로 얼마든지 상대화될 수 있다. 마치 스피노자처럼 신을 최대로 밀고간 것 아닌가?

(3) 천체의 움직임과 ‘하루’의 개념이 분리되면서, 비로소 이완의 개념이 나옴. 즉 시간을 운동, 천체의 움직임과 분리한 것이다.

“우리는 단지 ‘시간은 어떤 물체의 움직임이다’라는 극단적인 주장만을 제외 … 움직임이 아니고서도 시간은 움직임의 척도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움직임이 잠재적으로 측정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존재하기에는 충분치 않겠는가?”(49)

“시간이 움직임 그 자체라기 보다는 움직임의 척도라고 말할 때, 아우구스티누스는 천체의 어떤 규칙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움직임을 측정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기실 시간의 측정이 보다 긴 시간과 보다 짧은 시간을 비교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비교의 불변항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천체의 순환 운동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불변항이 될 수는 없다. 움직임은 멈출 수 있으나 시간은 그럴 수 없다.”(49)

그러나 번역을 잘못한 것인지, 아니면, 리쾨르가 논의를 엉성하게 한 것인지, 이완의 개념이 도출되는 과정에서 뭔가가 빠져 있거나, 난데없이 이완을 말하고 있다. 어쨌든 천체의 운동과 시간을 분리함으로써, 즉 변화하는 어떤 것으로 천체를 봄으로써, 불변항으로서의 시간의 자격이 박탈. 그렇게 해서, 정신쪽으로 관심을 돌린 것으로 이해하자.

“그 결과로 나에게는 시간이 이완에 다름아닌 것으로 나타나는데, 과연 무엇의 이완이란 말인가/ 모르긴 해도 그것이 정신 그 자체의 이완이 아니라면 우리는 놀랄 만한 일이다.”(50, 재인용)

“나는 시간을 통해 어떤 물체의 움직임을 측정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기 때문에, 또 어떤 짧은 시간을 통해서만 긴 시간을 측정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천체의 움직임은 변할 수 있는 것으로 가정됨으로써 어떠한 물리적 운동도 비교의 불변항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의 연장이 정신의 이완이라는 사실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50)

(4) 그러나 정신의 이완 개념과 세겹의 현재 개념이 연결되지 않으면, 여전히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정신의 이완을 세 겹의 현재의 변증법과 연결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아직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존재를 결여한 존재라는 첫 번째 수수께기를 풀었던 세겹의 현재에 대한 논제와, 연장을 갖지 않는 물체의 연장이라는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정신의 이완에 대한 논제를 확실히 연결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세 겹의 현재를 이완으로, 이완을 세 겹의 현재의 이완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점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제11서의 정수이며, 후설과 하이데거, 그리고 메를로-퐁티는 그 궤적을 따라 갈 것이다.”

3. 긴장과 이완

(1) 우리가 측정하는 시간은 ‘흘러가는 시간’이라는 논제의 모순

우리가 시간을 측정할 때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도, 이미 존재하지 않는 과거도, 연장을 갖지 안는 현재도 아닌 흘러가는 시간들이다. 바로 흘러감 그 자체, 지나감 속에서 현재의 다원성그 찢김을 동시에 동시에 찾아야 한다.”(52)

다음으로 리쾨르는 “지금 울리고 있는 소리, 이제 막 울렸던 소리, 연이어 울리는 두 가지 소리”에 대한 아우구스의 유명한 예를 논의한다. 그런데, 번역자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아무렇게나 번역을 했고, 또 리쾨르가 양장수 스타일로 논제를 명확히 말하지 않고 있어서,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다만, 두 번째 예까지의 내용을 어림짐작으로 유추해보건대, “흐르는 시간을 측정”한다는 문제는 모순적인 것이, 가령 소리가 측정되려면 소리가 울리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소리가 울림을 그치기 전까지는 측정을 할 수가 없다. 즉 소리가 ‘아직adhuc’ 흐르고 있을 때는 흘거감을 측정할 수가 없다. “시작과 끝, 즉 측정할 수 있는 간격이 있기 위해선 실제로 어떤 것이 멈추어야 한다.”(53) 그러나 또한, “존재하기를 그친 것만 측정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앞서의 논리적 모순에 빠진다.”(54) 왜냐하면 존재하기를 그친 것은 감각, 지각 할 수 없는 것이므로 측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흘러가는 시간들을 그것이 멈추었을 때도, 이어질 때에도 측정할 수 없다면, 그 모순은 더욱 심화된다.”(54) 따라서 “우리가 측정하는 것은 미래도, 과거도, 현재도, 흘러가는 시간들도 아니다.”라고 결론을 짓는다.

(2) 흘러가는 시간을 측정할 때 필요한 요소: 기억과 회고

리쾨르는 세 번째 논제로 “앙브루아즈 Anbroise 송가에 실린 만물의 창조자인 신 Deus creator omnium라는 시구를 인용” … “이어지는 소리의 경우보다 훨씬 복합적인 특성, 즉 시구versus라는 어떤 독특한 표현의 내부에서 4개의 장음절과 4개의 단음절이 번갈아 나타나는 특성을 보이는데” 바로 이 복잡성 때문에, 앞에서처럼 지나가버리거나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분석할 때와는 전혀 다른 것을 끌어들여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기억과 회고 re’trospection”이다. “이렇게 해서 바로 이 세번째 예를 통해서만 측정의 문제와 세 겹의 현재의 문제가 연결된다.”(54) => 결국 기억의 문제를 끌어들이기 위해 이렇게 긴 얘기를 했단 말인가?

“짧은 것을 붙잡아 tenere 긴 것에 대어볼 applicare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미 멈추어버린 것에서 무엇을 붙잡을 것인가? … 이미 존재하지 않거나 아직 존재하지 않는 음절이 아니라,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 흔적이나 기다림 속에 담긴 징조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 모순은 해결된다. 따라서 ‘내가 측정하는 것은 그 음절 자체, 즉 이미 존재하지 않는 음절 자체 ipsas가 아니라 내 기억 속에 in 있는 어떤 것, 거기서 움직이지 않은 채로 머물러 있는 in-fixum manet 어떤 것이다”(55)

측정을 하려면 비교를 하거나 두 개의 계기가 필요하다. 이때 필요한 것이 기억과 느낌. 둘 다를 놓고 거기서 질을 인지하는 것이니까. 다시 말해, 지나가고 없거나,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하는 순간적 현재의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리쾨르가 예시하고 있는 것은 바로 기억이라고 하는 흔적 혹은 지나가지 않고 머물러 있는, 존재하는 잠재성이다. 잠재성 안에서 모순이 해소되는 것이다. 들뢰즈의 논의와도 유사하다. 이것이 바로 측정의 문제와 세겹의 현재의 문제가 연결되고 있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이것은 변증법의 무화가 아닌가? 변증법은 사물성을 전제로 하는데, 여기서는 모순이 해소되고 있으며, 둘 다를 희생하지 않고 공존하고 있지 않은가? => 어쨌든 결국, 모순의 해소는 기억, 남아있는 것을 통해서이다. 앞서 말했던 “과거의 현재”, 혹은 “이미지-흔적” …

“… 엄청난 이점이 있다. 이제 시간의 측정이 외부의 움직임의 측정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긴 시간과 짧은 시간의 비교를 가능케하는 고정 요소를 정신[기억] 그 자체 속에서 발견했다. 즉 이미지-흔적과 더불어 이제 중요한 동사는 지나가다 transire가 아니라 머무르다 manet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두 가지 수수께끼–존재/비존재의 수수께끼와 외연을 갖지 않는 것의 측정이라는 수수께끼–가 동시에 해결된다… . “나의 정신이여, 나는 바로 네 속 in te에서 시간들을 측정하는 것인가?”(56)

바로 그 다음 구절에서, 리쾨르는 아우구스의 시간측정의 핵심을 말한다. 그에 따르면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정신 속에 남겨진 흔적 혹은 인상 affectio이, 여전히 정신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그것을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인상의 개념을 이용하여 말하고 있다.

“그 일들이 지나가며 네 속에 만든 인상은, 그것이 지나간 후에도 거기에 머물러 있으며 manet, 내가 측정하는 것은 지나가면서 인상을 남긴 그 일들이 아니라, 바로 현재 남아 있는 그 인상이다.”(56, 재인용)

그러나 바로 이점이, 아우구스의 시간론과 베르그송의 차이가 있다. 베르그손은 그 남아있는 인상이 지나가는 것 그 자체라고 보았다. 기억은 지나가는 그것 안에 있는 것이므로 아우구스는 기억을 잔상에 불과하다고 보고, 베르그송은 잔상 이상의 것이라고 보았다. 혹은 남아있는 현재적 인상과 과거 그 자체는 다르고, 그 과거 자체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잠재적 실재로 현존한다고 본 것이다. 잠재적 실재는 이미지-실재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의 관점에서는 과거와 현재의 본성적 차이가 없다. 모두다 현재적 이미지의 다른 양태일 뿐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잔상이기 때문에 그것이 그것이다.

(3) 정신의 긴장: 그러나 인상의 개념 말고 정신의 능동적 활동의 관점에서 현재를 정의해야 정신의 이완이라는 개념에 도달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정신의 이완이란 정신의 어떤 활동인 반면 인상의 개념은 정신이 아닌 정신 안에 있는 어떤 수동적인 현상에 불과하므로.

그러나 정신에 남아있는 인상이란 지나가는 어떤 것의 순간일 뿐이지, 거기서 지속, 연장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이 인상과 관련이 있는 정신의 능동적 성격이 함께 고려되지 않는 한, 인상의 개념 역시 정신 안에 있긴 하지만 정신 자체의 문제는 설명이 안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리쾨르는 “정신의 능동성/인상의 수동성”을 대조한다.

“즉 미리 구성하고, 기억에 의지하고, 암송을 시작해서 끝까지 이어가는 등, 수동적인 이미지-징조와 이미지-흔적이 겹쳐 놓는 능동적 활동들[즉, 현재 안에서 벌어지는 미래적, 과거적 행위들의 중첩]을 살펴보아야 한다.”(56)

“암송이란 우선 시 전체를 향한, 이어서 그 행위가 종결되기까지 시의 나머지 부분을 향한 기다림에서 비롯되는 행위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57)

즉 시의 암송에서 한 구절, 한 구절의 순간은 즉 현재적 순간들은 시전체와의 연결 안에서만 가능한 행위이다. 따로 떼어내어 ‘순간’ 이라고 할 수 없다. 거기에는 지나간 구절의 흔적과, 나올 것의 기대가 얽혀 있는 것. 따라서 현재는 순간이 아니다.

“암송하는 행위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설명을 통해 현재가 갖는 의미는 바뀐다. 즉 현재란 이제 어떤 점, 더구나 흘러가는 어떤 점이 아니며, “현재의 긴장 praesens intentio”인 것이다. 만일 정신의 집중이 그처러 ㅁ긴장이라 불릴 수 있다면, 그것은 현재를 통한 이행이 능동적인 이행이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는 단지 지나갈 뿐만 아니라 “현재의 긴장은 미래를 줄여 과거를 늘리며서, 미래를 다 써버림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과거가 될 때까지 미래를 과거 속에 흘러가게 한다 traicit”(57)

마치 선형적이고 순차적인 연속처럼 말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것이 동시적 공존이라고 한다.

“이제 세 개의 동사로 표현되는 세 가지 행동에는 수동성이 투영된다. 즉 정신은 “기다리고 expectat, 주의를 기울이며 adtendit [이 동사는 현재의 긴장을 상기시킨다]. 기억한다 meminit”. 그 결과 “정신이 기다리는 것은, 자신이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을 가로질러, 자신이 기억하는 것 속으로 지나간다”(57)

“한편으로 지나간다는 점에서 현재는 하나의 점으로 in puncto praeterit 환원되는데, 바로 그것이 현재가 연장을 갖지 않는다는 가장 극단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현재는 지나가게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주의력은 “존재하게 될 것을 부재를 향해 나아가게 한다pergat”라는 점에서, “주의력은 연속적인 어떤 지속 perdurat attentio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해야 한다.”(58)

현재의 주의력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지나가게 한다는 점에서 연속적인 어떤 지속이 있다. 즉 현재는 지나간다는 점에서는 수동적이고 순간적이지만, 또 한편 주의력은 지나가게 한다는 점에서 능동적이고 지속적이다. 지나가게 하려면, 그 지나가는 것보다 오래 견뎌야 하고, 그것이 아직 오지 않을 때와 지나가고 난 이후에도 있어야 하므로?

“기다림과 기억은 바로 정신 안에, 따라서 인상의 자격으로 연장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인상은 정신이 행동하는 한에서, 다시 말해서 기다리고 주의를 기울이고 기억하는 한에서만 정신 안에 있는 것이다.”(58)

그렇기 때문에 시간은 행동의 정신적 형태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 범위는 어떤 연장 extensio, 즉 그 내부에서 어떤 주의력-정신의 긴장을 감싸는 이완이다. 그로써 시간은 내부적으로 행동–시간은 그 정신적 형태다–과 연결된다. 행동의 정신적 형태: 시간!

(4) 정신의 이완: 현재적 긴장(주의력)과 기대와 기억의 불일치 혹은 불화

위에서는 세 겹으로 이루어진 “현재의 긴장”으로 세겹의 현재 이론을 설명했는데, 이제는 이완의 개념이 어떻게 세 겹의 현재 이론과 연결되는가가 문제이다. 아우구스에 따르면 “긴장의 폭발에서 이완을 솟아오르게 한다”고 한다. 정신에서 일어나는 아주 중요한 대목을 읽어보자.

“내가 아는 시 한 편을 읊으려 한다고 생각해보자. 내가 그 시를 읊기 전에는 나의 기다림이 그 시 전체에 펼쳐져 있다tenditur. 그러나 내가 그 시를 읊기 시작하자마자 읊은 그 부분은 기다림의 영역에서 떨어져나와 과거로 옮아가며, 이번에는 나의 기억이 그들을 향해 펼쳐진다 tenditur. 그리고 나의 활동 actionis이 갖는 살아 있는 힘들은 내가 이미 읊은 부분으로 인해 기억을 향해, 그리고 내가 읊으려고 하는 부분으로 인해 기다림을 향해 늘어간다 distenditur.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주의력 attentio은 거기, 현재에 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통해 미래였던 것은 이행하여 traicitur 과거가된다. 이 행동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agitur et agitur, 기다림이 완전히 다 없어질 때까지 기다림은 줄어들고 기억은 늘어난다. 그때 모든 행동은 끝을 맺고 기억 속으로 흘러간다”(58-59, 재인용)

그러니까, 아우구스는 시를 읊을 때, 읊기 전의 시 전체에 기대를 가지고 혹은 기다리고 있는 경향이 있고, 또 한편 시를 읊기 시작하면서 이미 읊은 구절은 기대감에서 떨어져 나와 기억의 경향으로 나아가고, 이 기대감과 기억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찢어지고 있으며, 한편 이 분열의 과정 속에서도 여전히 현재적 주의력, 즉 지금 읊고 있는 구절에 집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은 결국, 시를 읊어가면 읊어갈 수록 기대하고 있는 미래의 구절들이이 점점 줄어들면서, 과거는 늘어가고 있는 과정이며, 모든 기대가 끝나면 모든 것이 기억이 되어버리는 과정이다. => 그러나 역기서 아우구스는 간과한 것이 있다. 미래라는 것이, 이미 주어져 있는 하나의 시 전체라고 환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미 주어진 시를 읊는 과정은 베르그송의 용어를 빌자면 ‘이미 펼쳐진 부채를 접었다가 다시 펼치는 과정’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 때에는 미래는 점점 줄어들고 과거는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시의 암송이 아닌 시를 짓는 활동의 경우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로써 아우구스의 시간론의 핵심은 주어진 시간, 미리결정된 시간에 따른 정신의 활동으로 국한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리쾨르는 정신의 이완에 대하여 중요한 정의를 내린다.

“기다림과 기억은 둘 다 그 자체가 ‘펼쳐져’ 있다고 말한다. 즉 전자는 시를 읊기 전에 시 전체를 향해, 후자는 이미 읊은 부분ㅇ르 향해 펼쳐져 있다. 주의력으로 말하자면, 미래였던 것이 과거로 되는 것을 향한 능동적 ‘이행’에 그 모든 긴장이 있다. ‘나아가고 나아가는 것’은 바로 기다림과 기억, 그리고 주의력이 결합된 이러한 행동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완이란 행동의 세 가지 양태의 균열, 불일치에 다름 아니다.”(59)

기다림은 시 전체를 향해 펼쳐지고, 기억은 지나간 시 전체에 펼쳐지고, 주의력은 그 양쪽 모두에 펼쳐져 있다. 들뢰즈가 베르그송의 기억론에서 과거 전체에 걸쳐 있다는 말의 의미를 여기서도 볼 수 있다. 리쾨르나 들뢰즈나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리쾨르는 다음에 이어 아우구스의 구절을 인용한다.

“그리고 나의 활동이 갖는 살아 있는 힘들은, 내가 이미 읊은 부분으로 인해 기억을 향해, 그리고 내가 읊으려고 하는 부분으로 인해 기다림을 향해 늘어난다.”(59, 재인용)

(5) 정신의 이완: 이완의 개념은 인상의 수동성과 관계가 있는가?

리쾨르가 아우구스의 현재론을 분석하는 과정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현재의 질적 다양성을 그 계열에 따라, 혹은 본성적(?)으로 달라지는 양태에 따라 분할하고 가르는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렇게 분할된 질들이 서로 균열과 불일치를 통해 현재를 구성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이것이 잠재적 원근법이다. 기사든 뭐든 글을 쓸 때 이러한 방식으로 쓰자). 마치 하나의 흐름 속에 있는 질적 다양성을 그 관점과 원근에 따라 포를 뜨듯이 갈라내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는 정신의 이완의 개념, 즉 미래에의 기대와 과거에의 기억이 서로 상반된 방향으로 경향성을 갖는 이완상태, 찢어짐, 늘어남이라는 것이, 앞서서 말했던 인상의 수동적 상태와 어떤 연관을 맺는가 하는 것이다. 이미 언급한 바에 다르면 인상은 “비록 소리를 내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낭송하는 행위의 ‘긴장’에 대한 수동적 이면으로 여전히 이해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우리가 암송을 하면서 지나가고 가로질러가고 있는 동안에 뭔가가 남아있는 것, 즉 “머물러 manet”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인상이다. 즉 행위의 긴장에 대한 수동적 이면인 셈이다. 이완상태에서의 수동적 이면은 무엇인가? 이완상태란 바로 세가지 질적 다양성이 찢어지고 서로 다른 경향을 갖는 것이라면, 이 수동적 이면 역시 찢어져 존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리쾨르는 이를 “이미지-흔적”과 “이미지-징조”로 말하는 것 같다.

“따라서 우리가 정신의 이완느낌의 수동성을 접근시킨다면 … 지향적 활동이 그 활동 자체에 의해 만들어지는 수동성, 우리가 부득이 이미지-흔적이나 이미지-징조로 지칭하는 수동성을 상대물로 가지고 있는 한, 세 가지 시간적 지향은 서로 분리된다고 말해야 한다… . 두 가지 수동성, 즉 기다림에 결부된 수동성과 기억에 결부된 수동성 사이의 불협화음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정신은, 그것이 긴장이 되면 될 수록 더 이완을 겪는다.”(60)

“아우구스티누스의 발견이 더 없이 귀중한 것은, 그것이 시간의 연장을 정신의 이완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세 겹의 현재의 한 가운데, 즉 미래의 현재와 과거의 현재, 그리고 현재의 현재 사이에서 끊임없이 생겨나는 균열과 그 이완을 연결시킨 점이다. 이처럼 그는 기다림, 주의력, 그리고 기억의 지향점들이 이루는 화음 concordance으로부터 끊임없이 불협화음 discordance이 태어나고 또 내어난다고 생각한다.”

화음의 불협, 불일치의 일치, …

(6) 송가의 암송 행위는 정신이 그 속에서 긴장과 이완을 하는 행동들의 범례이다.

“시 전체에서 일어나는 것은 그 각각의 부분들, 그리고 그 각각의 음절들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보다 폭넓은 어떤 행동 in actione longiore–시는 아마도 그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인간의 삶 전체에서 일어나며, 인간의 모든 행동actiones은 그 부분들이다. 그리고 인간의 자손들이 살아간 역사 전체에서 일어나며, 인간의 모든 삶은 그 부분들이다.”(62, 재인용)

이렇게 작은 시에서 시작해서 인생 전체, 그리고 사회와 세계 전체에 걸쳐 일어나는 잠재적 펼침이 암시되고 있다. 리쾨르는 이렇게 아우구스가 암시만 했던 이 논제를 증명하는 것이 자신의 프로젝트의 목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미 언급했듯이, 인생 전체의 문제와, 시를 암송하는 문제는 그 근본에 있어 다른 것이다. 시의 암송은 주어져 있는 시를 다루는 것이지만, 인생 전체는 주어져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4. 영원성과의 대조

지금까지 리쾨르는 아우구스의 책에서 어찌보면 가장 중요한 구절(14장 17절, 28장 37절)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원성에 대한 깊은 사색”을 배제하고, 시간의 측면에서만 논의를 해 왔다. 그런데 이제 마지막으로 시간의 개념을 영원성과 대조함으로써, 아우구스는 영원성의 영역에 비해 시간이 얼마나 결함이 많고 빈약하고 한계가 있는 것인지를 논증하고자 했지만, 실은 리쾨르가 보기에는 오히려 이러한 대조를 통해 시간성이 더 강화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를 주장하고 있다. 어떤 점에서 볼 때, 이러한 논증 방식은 일종의 해체적인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논의했던 “시간의 긴장과 이완의 대조”라고 하는 구도가, 이 장에서는 “정신의 이완 즉 시간성과 영원성의 대조”로 자리를 바꾸어 논의되고 있다. 서둘러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시간에 있어서의 긴장과 이완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시간성과 영원성의 관계는 정신의 이완과 긴장(응축, 함축, 충만)의 관계를 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현재와 과거(미래)를 대조하듯이, 영원한 것과 이완된 것을 대조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논의 했던 “정신의 이완”이 가지는 의미, 즉 시간의 비-존재성과 측정의 모순을 잠재성 속에서 해속, 즉 질적 다양성의 공존의 개념으로 해소했지만, 그럼에도 뭔가 빠진 것이 있다는 것인데, 이는 영원성과의 대조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리쾨르는 이러한 시간성과 영원성의 대조가 시간론에 있어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세 가지로 압축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 세 가지는 대단히 복잡하고, 잠재적으로 설명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요약하기는 쉽지가 않다. 그 구체적인 구절들은 책을 읽으며 하나하나 따져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간단히 요약함으로써, 리쾨르가 이 장에서 말하고자 하는바, 즉 영원성과의 대조를 통해 시간성이 강화되고 있다는 논지의 큰 틀을 가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 시간의 한계에 대한 관념

시간과 영원성을 대조함으로써, 시간뿐만 아니라 시간 외의 “시간의 타자”를 생각하게 함으로써, 시간에 대한 “한계-관념ide’e-limite의 지평 아래 시간에 대한 모든 사변을 위치”시킨다. => 즉 영원성과 대조함으로써 시간의 한계에 대한 관념, 혹은 존재론적 결핍이라는 관념에 이르게 된다.(63쪽부터 73쪽까지 복잡하게 여러 주제들로 설명하고 있다. 중요구절을 설명과 함께 따올 것)

(2) 시간의 현실화

시간을 영원성과 대조함으로써, ”이완의 경험 자체를 실존적 차원에서 강화시키는 것이다.“ 즉 시간은 영원성의 결여인데, 이것이 다만 관념적으로 한계를 인식하는 것을 넘어서, 시간체험에서 실제로 느껴지는 결핍감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부정적인 것의 슬픔”이라고 말한다.

“영원성과 시간의 대조는, 시간에 대한 사유를 시간의 타자에 대한 사유와 결부시킴으로써, 시간의 경험을 단지 부정성으로 감싸는 데 그치지 않고 바로 그 부정성으로 시간 경험을 전율하게 한다. 이완의 경험은 이처럼 실존적 차원에서 강화되어 탄식의 층위로 상승된다.”(73)

결국, 정신적 이완이란 모든 지속, 장애,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중력장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탄식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영원성이란 그러한 지속, 장애가 없고, 충만하고 응축되어 있는 것. 균열, 이완, 지속이 없는 영원한 현재 상태를 말한다.(영원성에 대한 아우구스의 생각은 대단히 유치하고 만화적이기까지 하다)

정신의 이완은 더 이상 시간 측정에 관한 논리적 모순의 ‘해결책’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제부터 영원한 현재의 안정성을 박탈당한 정신의 균열을 표현한다. […] 이완이 다수성에로의 분산, 늙은이의 방랑과 동의어가 되는 반면 긴장은 내적 인간의 결집과 동일화되는 경향이 있다(“나는 유일자 l’Un를 따라가면서 나 자신을 모은다”).“(75)

따라서 긴장이란 마치 시를 읊기 시작하여 점차 과거로 넘어가는 과정 이전에, 도래하지 않은 시 전체를 “기대하는 것”이다. 반면에 이완은 이미 구절들이 읊어지면서 분산된 다수성 혹은 과거가 되어버린 것들 속에서의 방랑 같은 것이다. 그것은 “노인의 상징”이다.

“이리하여 과거를 잊고, 미래의 덧없는 일들이 아니라 앞에 놓여있는 일들을 향해, 그리고 나를 이완시키는 것이 아니라 긴장시키는 일을 향해 돌아섬으로써, 나는 이완의 노력이 아니라 긴장의 노력을 통해 저 높은 곳에서 나를 부르는 영광의 길을 따라 걸어갑니다.”(75, 재인용)

이렇게 해서 영원성 혹은 긴장과 대조적인 이완과 시간의 이미지를 통해, 시간이 파편화된 실재성과 관련이 있음을 논증하는 가운데, 리쾨르는 Stanislas Boros 신부가 말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성의 범주에 있어서의 네 개의 “종합적 이미지”를 말한다. 이는 “유한자의 슬픔”을 “절대자에 대한 찬양”과 쌍을 이루게 된다. 보로스에 따르면 시간성의 네 가지 범주는, (1) 해체로서의 시간성(붕괴, 사라짐, 함몰, 종말, 분산, 변질, 빈곤), (2) 고통으로서의 시간성(죽음, 질병, 허약, 내적 갈등, 늙음), (3) 추방으로서의 시간성(고난, 유배, 허약, 유랑, 향수, 헛된 욕망), (4) 밤의 시간성(눈멂, 어둠, 흐릿함의 이미지) 등이 있다. 반면에, 영원성의 체계는 “생성하는 힘”, “다시 모음”, “살아있는 충만함”, “안락함”, “빛의 비유” 등이 있다.

(3) 시간의 내적 계층화 혹은 질적 다양성의 원근화

시간을 영원성과 대조함으로써, 이완의 경험 자체가 영원성을 닮아감으로써, 스스로 그 안에서 내적으로 계층화될 수 있도록 부추기는 기능을 가질 수가 있다. 즉 “영원성과 시간의 변증법이 정신의 이완의 해석에 미치는 세번째 영향”은, 바로 “시간 경험의 한복판에서 그러한 경험이 영원성이라는 그 극단과 멀어지는가 아니면 다가가는가에 따라 시간화의 층위를 단계적으로 구분하도록 부추긴다” 것이다.=> 이는 마치 베르그송의 삼각뿔처럼 응축된 영원성과의 거리에 따라 시간화의 층위가 일어난다는 말처럼 들린다. 다만, 마치 플라톤의 이데아론처럼, 영원성의 이미지에 가까워질 수록, 그리고 멀어질 수록, 그에 따라 시간성의 계층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영원한 말씀과 인간의 목소리의 차이”뿐만 아니라, “그 둘 간의 의사소통” 즉 “말씀은 ’ 그 안에서’ 우리가 찾고 귀로 듣는 내면의 주인이다’라고 하는 가르침돌아옴으로 이어지고,

“따라서 우리와 언어의 최초의 관계는 우리가 말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며, 외적인 을 초월하여 내적인 말씀을 우리가 듣는다는 것이다. 돌아옴이란 이러한 귀기울임에 다름아니다. 그 까닭은 만일 “우리가 방황하는 동안 근원이 머물러 있지 않다면, 우리에게는 되돌아갈 곳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으로부터 되돌아온다면 그것은 바로 앎을 통ㅎ ㅐ되돌아오는 것이다. 말씀은 앎을 얻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가르치는데, 말씀은 근원Pincipedlau 우리에게 말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르침과 깨달음, 그리고 돌아옴은 서로 고리를 이룬다. 가르침은 영원한 말씀과 시간적 목소리 사이에 파인 심연을 뛰어넘는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영원성의 방향으로 시간을 드높인다.“(78)

“말씀에 귀기울이는 자의 “한들이지 않는 마음”과 그들의 “변덕스러운 마음”을 대립시키면서, 영원한 현재와 흡사한 이러한 평안함을 환기한다.”(78)

“사람의 마음이 평안함을 얻고, 불변의 영원성, 곧 미래도 과거도 아닌 그 영원성이 어떻게 미래와 과거의 시간들을 구성하는지를 dictet 알 수 있도록 누가 그 마음을 붙잡을 것인가?”(79)

그렇게 해서 리쾨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에서 긴장/이완의 변증법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던 어떤 확신(자꾸만 신의 영역에 회의를 가지면서, “누가 붙잡을 것인가?”)이 나중에 영원성과 시간의 변증법에서 발견되는데, 그러한 안정성, 영원성이란 바로 미래, 즉 희망의 시간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영원성에 대한 희원은 바로 이완의 경험 한복판에서 표명된다고 적는다.

“내가 정화되고, 당신의 사랑의 불길에 용해되어, 당신 안ㅇ로 흘러 들어가게 될 그날까지 donec”(79)

다음으로 리쾨르는 지금까지 언급했던 성과 시간의 대조 혹은 변증법이 주는 중요성 세 가지를 다시 정리하면서, 첫 째 기능과 두 번째 기능에 이어 마지막 세 번째 기능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 시간을 무로 돌리는 영원성이라는 한계-관념의 지평 아래 소멸된 것으로 시간을 생각함으로써만 그 모습이 강화되는 것은 아니다. (2) 또한 그러한 강화가 아직 사변적 추론에 지나지 않았던 것을 탄식과 신음의 영역으로 옮기는 것으로 귀착되지도 않는다. (3) 그것은 보다 근본적으로 시간의 경험 자체에서 내적인 계층화를 위한 방법을 끌어내고자 하며, 그 이점은 시간성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 심화하는 것이다.”(79-80)

여기서의 계층화란 영원성, 긴장을 통해 이완과 시간을 보다 더 구체화하고, 극화하고, 그 질적 다양성을 더 강렬하게 한다는 말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인간의 시간이 갖는 권리를 충분히 옳다고 인정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 시간성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심화시키고, 단계를 구분하고, 언제나 덜 ‘이완되어’ 있고 언제나 더 ‘긴장되어’ 있는 시간화 층위들에 따라, 즉 이완된 것이 아니라 긴장된 것을 통해 그것을 배열하기 위하여, 시간의 타자를 고백해야만 했었을 것이다.”(80)
Paul Ricoeur의 <시간과 이야기>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