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사와 시간

묘사와 시간

알랭 로브그리예(Alain Robe-Grillet)의 소설 <질투>(La Jalousie)에 나오는 몇 몇 구절을 계획이나 목적 없이 띄엄띄엄 옮겨 보았다.

“지금 기둥ㅡ지붕의 남서쪽 모서리를 받치고 있는 기둥ㅡ의 그림자는 기둥 밑에 맞닿은 테라스의 동위각을 정확히 반분하고 있다. 이 테라스는 지붕으로 덮인 넓은 회랑(回廊)의 형태로, 집을 세 면에 걸쳐 둘러싸고 있다. 테라스의 폭은 집의 중앙과 양쪽 편이 같기 때문에 기둥이 투사하는 그림자의 직선은 정확하게 집 본체의 모서리에 가 닿는다. 그러나 그림자는 그곳에서 끝난다. 태양이 아직 중천에 떠 있어, 테라스 바닥의 포석들만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집의 목조 벽들, 그러니까 정면과 서쪽 박공에는 지붕 때문에 햇빛이 들지 않는다. (이 지붕은 집의 본체와 테라스를 함께 덮고 있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 지붕의 모서리 그림자는 집의 모퉁이, 두 벽면과 테라스 면이 만나 생긴 직각선과 정확히 일치한다. [. . .] 시냇물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만곡을 그리며 소농지의 가운데 폭을 좁혀 놓았다. 정확한 사다리꼴이라면 농지의 중앙 부분에는 열 여덟 그루의 바나나 나무가 있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열 여섯 그루뿐이다. 왼쪽 끝에서 두 번째 줄에는 만약 농지가 네모꼴이라면 스물두 그루의 나무가 있어야 할 것이다. [. . .] 또 농지가 정확한 사다리꼴인 경우에도 스물두 그루의 나무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아래쪽 경계선이 아주 약간 좁아졌다 해도 여간해선 느껴지지 않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거기엔 스물두 그루의 나무가 있다. 그런데 세 번째 줄에도 나무가 스물두 그루만 있을 뿐이다. 만약 농지가 네모꼴이라면 스물세 그루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지점까지는 시냇물이 휘어졌어도 이렇다 할 만한 변화를 초래하지 않는다. 네 번째 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네 번째 줄에는 스물한 그루의 나무가 있는데, 네모꼴 농지를 가상으로 그려볼 경우 짝수 줄에 있어야 할 나무 수보다 한 그루 모자란 수다. [. . .] 실제로 있는 바나나 나무와 잘려나간 나무를 구별하지 않는다면 여섯 번째 줄에 있는 나무의 수는 다음 중 하나 일 것이다. 스물둘, 사물하나, 스물, 열아홉, 순서대로 각각 네모꼴일 경우, 사다리꼴일 경우, 아랫부분이 굽은 사다리꼴일 경우, 마지막으로 사다리꼴이되 수확 때 잘려나간 나무를 뺀 경우이다. 그 다음 줄들은 다음과 같은 숫자가 된다. 스물셋, 스물하나, 스물하나, 스물하나, 스물하나, 스물, 스물, 스물셋, 스물하나, 스물, 열아홉 등등. . . .”(알랭 로브그리예, <질투>(La Jalousie), 박이문, 박희원 옮김, 민음사, 2003. 여기저기). [. . .]표시는 옮긴이.

이와 같은 묘사 방식은 첫 구절 뿐만 아니라 책 전체에 걸쳐 계속되고 반복된다. 한 남자의 신경증적이라 할 만큼 집요한 질투의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묘사는 리얼리즘이 구사했던 유기적 묘사ㅡ묘사가 인물들의 행동을 보조하거나 작가가 그리려는 세계 전체와 일치되어 하나의 요소가 되는ㅡ와는 본성적으로 다르다. 묘사는 재현된 세계 전체와 일치되지 않고 부유한다. 또한 특정 장소와 세계-공간 안에서 행동하는 인물과도 균열을 일으킨다. 묘사는 더 이상 세계를 재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묘사 그 자체가 묘사의 대상이 된다. 즉 순수 묘사이다. 나아가 순수 묘사는 시간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에 이른다(로브그리예의 경우 직접적 현재). 왜냐면 할 일없는 사람(또는 미쳐서 제기능을 못하는 사람)이나 이런 일을 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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