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사티

에릭 사티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Svyatoslav Teofilovich Rikhter)는 자신의
음악노트에서 프랑스인들이 에릭 사티(Erik Satie)에 열광하는 것을 의아스럽게 생각했다.(『리흐테르: 회고담과 음악수첩』, 브뤼노 모생종
편저, 이세욱 옮김, 정원출판사, 2005, p.484.) 그는 사티의 음악에 자신이 모르는 어떤 암시가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 했지만, 그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음악 자체가 주는 암시 때문이기 보다는 삶의 암시, 즉 정서의 차이가 아니었나 싶다. 만일 그가 으젠느 앗제(Eugène
Atget)의 사진을 보았더라면 그의 생각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사티를 들으며 앗제의 사진을 떠올리거나,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의 우울한 산문시편들을 암송하거나, 그르니에(Jean Grenier)의 낯선 도시를 상상해 보라. 하다못해 이른 새벽의
골목길이나 모두가 집으로 돌아간 후 소리없는 저녁 도시의 거리를 상상해보라. 어째서 프랑스인이 아니 현대인이 사티에 심취할 수 밖에 없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이를 체제에서 비롯된 현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사티의 음악네는 공동체를 잃어버린 섬들의 서구적 감수성이라 할만한
것, 말하자면 “혼자서 걷고있는 현대인”이 있다. 이것은 다른 음악가들에게는 없는 것이다. 사티가 연주된 후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이나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나 쇼팽(Fryderyk Franciszek Chopin)의 피아노
소나타가 흘러 나온다고 생각해보라. 우리는 그 낯선 시대 앞에서 갑자기 의상과 말투를 바꿔야 하거나, 그러한 거추장스런 코스프레 도구들이
망가지지나 않았나 신경을 써야할지도 모른다. 너무도 친숙해서 거추장스럽고 낯선 저 대가들의 시대적 범례들(decorum)과는 다르게, 사티의
음악에 깃들어 있는 낯선 풍경들은 오히려 포근하기까지 하다.

에릭 사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