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Duble_herma_of_Socrates_and_Seneca_Antikensammlung_Berlin_07

세네카(Lücius Annaeus Seneca)가 다양한 고전의 사례들을 통해 보여주었던 것은 하나의 기질로서의 “화”(anger)라기 보다는 “방식”의 문제였던 것 같다. 그가 고집스럽게 만류했던 “화”는 감정상태가 아니라 그 감정의 미숙한 처리였던 것이다. 격정과 화를 구별해야 한다고 충고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네카에게 있어 화는 형이상학적 대상이 아니라 실천윤리, 즉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기술로서의 윤리학적 관점에서 접근해야할 문제였다. 일종의 처세술이랄까? ‘화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화를 조절하고 절제할 수 있을까?’ 형이상학자였다면 이런 식으로 멋진 말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화에 대한 최고의 치유책은 유예다. . . . 설사 화를 유예시킴으로써 네가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적어도 그것은 이제 화의 모양새가 아니라 심판의 형태를 취할 수 있게 된다. 네가 어떤 일의 성격을 알고자 할 때는 언제나 그 일에 시간을 주어라. 일렁이는 물결 위에서는 아무것도 정확히 판단할 수가 없다.”(세네카, <화에 대하여>, 사이, 2013, p. 183)

세네카는 “죽음”을 언급함으로써 모든 화(anger)가 무용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에게는 인간의 삶에 죽음만큼 현실적이고도 준엄한 사건은 없다. 필경사 바틀비(Bartleby)를 상상하는 변호사의 외부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상상의 부정적 토대가 되었던 바틀비 자신의 고독에서 우리가 목격했듯이, 절대적인 침묵은 문학이나 예술의 비유적인 문제가 아니라, 가장 치열하고도 현실적인 삶의 문제이다. 오히려 죽음은 행복, 평화, 초연과 같은 삶의 윤리적 이상의 가장 적절하고도 현실적인 동기이자 토대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 보다도 죽음이란 모든 은유가 현실이 되는 지점이다. 승리자든 패배자든 누구에게나 똑같은, 시간 차이도 그다지 크지 않은 하나의 결말로서의 죽음. 역설적이게도 이 결말 앞에서 모든 현실적 가능성들이 생명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세네카의 지극히 평범한 결론이 나오게 된다: “화를 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