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지만 기나긴 행복 투쟁

짧지만 기나긴 행복 투쟁

이곳으로 이사를 온지 6개월이 훨씬 지났지만,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화장실 벽에 붙여놓은 비누상자와 샤워기가 자꾸만 바닥으로 떨어져 버리는 것이다.

형편을 맞추어서 이사를 오다보니 좀 허름한 방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방뿐만 아니라 화장실 벽도 낡아 있었다. 못을 박으니 오래된 흰 색 타일이 쪼개져 버리는 바람에 손가락이 두 개는 들어갈 만한 구멍이 나 버렸다. 비누상자를 그냥 바닥에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공간이 비좁았기 때문에 샤워를 할라치면 바닥전체가 물에 고여 비누가 풀어헤쳐져 버렸다. 어떻게든 비누상자를 바닥으로부터 떼어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샤워기도 골치를 썪이는 문제이다. 공간이 좁은 탓에, 저렇게 높게 매달린 샤워기로 샤워를 하려면, 맞은편 벽을 딱 붙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나마 엉거주춤 선 자세로 샤워를 하려면 최소한 쏟아지는 물이 가슴 정도에 조준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 나의 자세로는 머리에도 조준이 안 될 만큼 샤워기가 너무 높았다. 샤워기 설비업자들은 자신이 설치한 샤워기로 최소한 한번쯤은 샤워를 반드시 할 것을 권하고 싶다. 필요하다면 국회에서 관련 입법이 상정되어야 한다. 어쨌든 나는 생활의 편의를 위해 저 조그마한 비누상자를 벽에 고정시켜야 하고, 무성의하게 부착된 샤워기를 내 몸에 맞게 내려서 다시 고정시켜 놓아야 한다. 귀찮은 것이긴 하지만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며칠을 미루어 놓고 있긴 했지만, 슈퍼에 갔을 때 생각이 났고, 즉시 압착꼭지(?)를 구입해 붙여 놓았다.

이 압착꼭지에 대해 설명하자면 아주 긴 평론 하나가 나올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짓은 하지 않겠다. 간단히 소개만 하겠다. 이 물건은 작은 원 모양으로 된 실리콘 혹은 말랑말랑한 플라스틱 재질로 만들어져 있다. 옴폭 들어간 중앙부분, 물갈퀴처럼 얇은 테두리, . . . 벽에 이 물건을 대고 압착시켜 누르면, 공기가 빠져나가 밑면과 벽 사이의 공간이 진공상태가 되어 실리콘이 벽에 달라붙는다. 진공상태는 우리로 하여금 두 가지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 하나는 중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다른 하나는 시간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사물들은 항상 아래로 떨어진다. 자연의 질서를 거부할 수는 없다. 공중에 매달린 물건들은 언젠가는 아래쪽으로 떨어지도록 정해져 있다. 이 자연의 질서는 시간이 보증을 선다. 시간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의 질서로 되돌아가게 한다. 자연의 질서로부터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해도, 시간은 우리더러 떠나온 그곳으로 되돌아가라고 명령한다. 시간은 모든 것들을 그 본래의 상태로 되돌린다. 마치 물 속으로 들어간 물건이 서서히 풀어헤쳐버리듯이. 딱딱한 사각의 비누가 물에 잠겨 풀어지면서, 분자들이 더 이상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 각자의 고유한 본성을 찾아 사방으로 흩어지듯이, 시간은 모든 것들을 흩뿌리며 사물을 그것이 생기기 이전의 분자적 상태로 되돌린다. 내 순수했던 어린 시절이 한참동안 함께 지낸 친구의 눈에서만 서서히 퍼져나오듯이 말이다. 시간은 정말이지 물과도 같다. 공중에 매달린 것들 역시 얼마가 지나면 모두가 그 원래의 자리를 찾아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버릴 것이다. 그러나 이 압착꼭지는 중력의 질서로부터 벗어나 벽에 단단히 붙어 중력과 시간에 맞서 물건들을 꽉 쥐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이다. 비누상자와 샤워기를 팽개치지 않고 벽에 달아두려는 내 욕구를 위해. 보다 문화적인 삶을 추구하는 우리를 더욱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문제는 이 도구조차도 중력과 시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중력과 시간을 하나의 좌절로 경험하게 만드는 장본인이랄 수 있다. 벽에 붙인 비누상자가 단 이틀만에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경고성의 고함처럼 둔탁한 소리를 내며. 딱! 그리고 약 3시간 후에 샤워기도 떨어져 버렸다. 떨어지는 충격 때문에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샤워기에 금이 나기까지 했다. 그것들의 추락을 보는 것은 적잖이 괴로운 일이다. 다시 붙여 놓아야 하는 무의미한 반복 때문이라기 보다는,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을 억지로 확인 받은 듯한 기분? 아니 어떤 굴욕감 마저 들기 때문이다. 허리를 굽혀 다시 그것들을 붙여 놓았다. 붙일 때는 벽면을 수건으로 말끔히 닦고, 습기가 없어질 때를 기다려야만 한다. 저것들이 쉽게 떨어지는 이유는 화장실에 습기가 차기 때문이다. 습기는 아라비아의 상인처럼 진공의 공간에 나 있는 미세한 틈으로 스며들어, 자연의 질서로부터 자유롭던 그 공간에 중력과 시간을 서서히 퍼뜨린다. 습기를 차단하기 위해서는 전보다 더 단단히 누르지 않으면 안 된다. 공기가 아직 다 빠지지 않았다 싶으면 손톱으로 밀어서 그 공기를 바깥쪽으로 몰아 낸다.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떼어내고 다시 붙인다. 떨어지는지를 손가락으로 당겨서 확인도 해 본다. 그러나 이 꼭지들은 5일 이상을 가지 못했다. 밤에 들어와 보면 도둑이라도 다녀간 것처럼, 비누, 상자, 샤워기, 꼭지 등이 바닥에 널부러져 있다. 오랫동안 벽에 붙어있으면 신경쓰지 않고 잊고 있지만, 하루에 두 세 번씩 떨어지는 경우엔 아주 성가셨다. 이제는 잘 붙어 있어도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잊어버릴만 하면 떨어지고, 잊어버릴만 하면 떨어지고, . . . 커다란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적극적으로 응수하지 않은 탓에, 나는 6개월 이상을 노이로제에 사로잡혀 저 꼭지들과 살고 있었다.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저것들을 벽에 붙이기 위해 내가 의존했던 진공상태는 또 하나의 자연의 질서가 아닌가? 자연의 질서로부터 단절하기 위해 내가 한 일은 기껏해야 또 다른 자연의 질서에 의존한 것이지 않은가? 곰곰히 생각해보니 어리석은 짓 같았다. 습기와 공기를 거부했지만, 사실상 그것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셈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되돌린다. 그러니 진공을 이용해 저 물건들을 벽에 붙이는 순간, 이미 바닥으로의 추락은 시작된 셈이다. 더 이상 바람이나 공기를 빼는 일과 같은 헛된 짓은 그만 두어야한다. 새로운 대안이 필요했다. 완전한 단절만이 우리를 구원해줄 것이다. 나는 슈퍼에 달려가 강력 접착제를 구입했다. 그것은 간단한 처방이었지만, 사실은 지금까지의 어떤 시도보다도 급진적인 것이었다. 나중에 집주인에게 싫은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지만 미안하지는 않았다. 주인으로서 그의 책임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도 여기서 일주일에 한 번씩은 샤워를 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더 이상 공기를 빼기 위해 손톱에 힘을 주지 않아도 될 것이다. 늦은 밤에 귀가해 화장실에서 놀라지 않아도 될 것이다. 주기적으로 나를 괴롭혔던 저것들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강력 접착제는 타일로 만들어진 벽과 실리콘 재질의 압착꼭지를 동화(同化)시킬 것이다. 더 이상 그들 사이에 어떠한 이물질도, 공기도, 바람도, 습기도, 자연적 질서도, 그 무엇도 거부할 것이다.

새로운 시도에 임한 나는 약간 흥분하면서 제품을 뜯어 꼭지의 밑면에 조심스럽게 접착제를 발랐다. 강력 접착제는 유제가 나오는 입구가 붙어버려 막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회사들은 뚜껑 안쪽에 작은 바늘을 꽂아두어, 뚜껑을 닫자마자 그 입구가 뚫리도록 했다.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도록 고안한 기발한 아이디어일 뿐 아니라, 생산자가 직접 사용을 해보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매우 섬세한 배려라고 생각했다. 접착 유제를 바르자마자 벽에 붙이면 안 된다. 접착제가 공기와 어느 정도 작용을 하여 더 단단한 점성을 갖도록 기다려야 한다. 그것을 부추기기 위해 입 바람을 부는 것은 괜찮다. 기다리는 시간이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잠시동안 숨을 죽이며, 그 물질의 변화를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간혹 급한 마음에 접착제를 바르자마자 붙여버리는 초심자도 있지만, 물건들을 지저분하게만 할 뿐 효과는 없다. 매사에는 때가 있는 법,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접착 유제의 색이 변해서 굳어가고 있는 듯 하여, 나는 표시해 두었던 부분에 꼭지를 힘껏 밀어 눌러 버렸다. 미끄러지는 느낌이 들어 단단히 손가락을 고정시키고, 약 1분 정도를 숨을 죽이고 누르고 있었다. 부착된 표면을 말리기 위해 입 바람을 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잠시 지나고 천천히 손을 떼서 부착된 부위를 눌러 보았다.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실리콘이 타일이 된 것인지, 타일이 실리콘이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어쨌든 전혀 다른 두 물질이 흡사해진 것이다. 이젠 습기도 두렵지 않았다. 수학자들은 저 둘이 연속(連續)한다고 말할 것이다. 저것들이 다시 떨어진다면 어제와는 전혀 다른 의미, 즉 더 이상 분리가 아니라 파손이 될 것이다.

무엇인가를 붙잡아둠으로써 우리는 편안해진다. 고정되어 있는 것은 매번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다시 돌아가 그것을 다룰 수가 있다. 비누상자와 샤워기가 그랬듯이, 자꾸 떨어지거나, 변하거나, 불안정한 것들은 내게 새로운 노력들을 강요한다. 그리고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가 함축하고 있는 불안의 소용돌이 속으로 나를 이끌어, 나를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하고 절망하게 한다. 인간이 더 이상 이주하기를 중단하고, 그 대신 소유와 같은 사회적 행위를 선택하였을 때, 비로소 온전한 의밍에서 문화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주하지 않게 되어 편안함을 느꼈지만, 그 대가로 우리는 불안정한 것들을 거부하면서, 미래의 불안을 안고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단단한 것처럼 보이는 곳에 고정되어 붙박이는 것, 혹은 내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들의 소매를 붙잡아 원하는 자리에 붙박아 놓는 것은, 다르게 보면 다가올 날들을 불안이나 절망과 관련짓는 행위일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두 부류의 인간이 있는 것 같다.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기대하며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인간. 그리고 결코 그러한 날들이 오지 않길 바라며 이 순간이 영원하다고 믿는 인간. 안주하기를 선택한 우리 모두는 바로 이 후자가 된 셈인가?

물론 개인이나 사회 모두에게 있어 안주한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안주는 잠시 동안이나마 안도감이나 편안함을 갖게 한다. 전통이나 역사에 안주해 있는 민족도 있고, 특정 권력집단에 부착되어 안도감에 사로잡힌 개인들도 있다. 충만한 인간관계 속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모두가 무엇인가에 고정되어 있거나, 무엇인가를 고정시키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 바램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우리는 영원한 정착이나 영구적 소유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만 “내가 죽기 전까지만 이라도 . . .!”라고 주문을 외우며, 고개를 돌려 눈을 감고 외면할 뿐이다. 사실 영원한 소유에 대한 환상의 본질은 저 이기심에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죽기 전까지만!” 순간접착제로 붙여놓은 저 압착꼭지도 언젠가는 떨어질 것이다. 내가 한 일은 저것을 조금 더 강하게 고정시켜 놓았을 뿐이다. 그리고는 잠깐 동안 영원성에 대한 환상으로 우쭐해 있다. 비누상자와 샤워기가 마치 저기 저렇게 영원히 붙어있기라도 하듯이!

의심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꼭지를 부착시키고 난 후 처음 몇 시간 동안은 기분이 매우 좋았다. 오랫동안 미루어오던 청소를 하고 난 후에 느끼는 자부심이나 대견스러움 같은 것과는 좀 다른 의미에서의 뿌듯함이었다. 그것은 나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는 수준이 다른 그런 문제였다.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지금은 한 달이 지났는데도, 저것들은 한 번도 떨어지지 않고 저렇게 건재하게 붙어 있다. 마치 다시는 자신의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않겠다는 듯이. 물건에 불과했지만, 저들의 저 독신자적인 자세가 믿음직스러웠다. 가끔 생각이 나서 손가락으로 당겨보았지만, 언제나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이젠 그것을 볼 때마다 생활의 승리감 같은 것을 느꼈다. 획득감이랄까? 복수감이랄까? 아니면, 뭐랄까 . . . 일종의 소유감이라고 말해두자. 그리고 그 감정은 나를 세속적인 행복감으로 이끌었다.

 

짧지만 기나긴 행복 투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