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정

천주정

지아장커는 현실을 “지배”와 “환상”으로 양분하고, 이 둘의 첨예한 모순 관계ㅡ수평선처럼 갈라진 화면의 윗 쪽엔 번영한 도시가 있고 그 아랫 쪽엔 도시를 떠받치고 있는 듯한 혹은 짓눌려 있는 듯한 낙후된 판자촌의 극단적 대조를 보라ㅡ를 드러내기 위해 두 개의 서사 양식을 뒤섞어 서로 공존하게 한다. 중국 자본의 극단적인 모순을 SF 환타지처럼 묘사했던 <스틸라이프>의 속편 같은 인상이 드는 <천주정>은 그 모순을 무협 활극으로 묘사한다. 전자가 환타지를 통해 체계의 낯선 폭력ㅡ외계인들의 우주 식민지 건설 같은ㅡ을 보여주었다면, 이 작품은 지배 관계가 보편화된 현실 속에서 환타지의 법적 상태인 범죄의 요소들을 통해 그 모순의 파국을 포착한다. SF가 마천루 위에서 자본과 노동의 첨예한 모순을 관찰함으로써 도래할 미래를 전망하거나 그 징후를 암시하는 시선으로 구성된다면, 무협 활극은 저 모순의 양적 팽창이 극단적인 지점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은 지각에서 행동으로의 전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느린 화면은 빠른 화면으로 교체 된다. <스틸라이프>에서 <천주정>으로 이어지는 전 과정ㅡ시간적으로는 거꾸로 된 듯한ㅡ은 마치 마르크스주의적 양질 전화의 이행을 보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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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가상이 구분 불가능해진 자본권(資本圈)의 실루엣을 인식하고 있는 지아장커는 리얼리즘을 가상으로 묘사하고 가상을 리얼리즘 안으로 끌어들이는 네오리얼리즘이나 누벨바그 이후 보기 드문 작가이다. 막연하지만 지나친 어떤 것,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끔찍한 상태를 유럽인들이 주시했다면, 지아장커는 이 상태가 모순의 형식으로 극단적이고 첨예해져서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환상인지 도저히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모순적 공존을 극화한다. 이 모순과 공존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상품 이미지일 것이다. 남성 고객들 앞에서 혁명군의 복장을 하고 혁명가를 부르거나, 전통 의상을 입고 춤을 추는 창녀들은 현실인가 환타지인가? 또는 창녀인가 예술가인가? 또 낙후된 지역의 전 근대적 공장 안에서 미싱 시다 노동을 하고 있는 시골의 젊은이들이 새 하얀 아이패드(iPad)와 스마트폰(Smart Phone)을 들고 손가락 하나로 세계를 검색하고 있다. 상품의 형식 안에서 모든 대립과 모순은 화해도 없이 기괴한 형태로 공존한다. 중국과 미국이라는 세계 구도가 서로 결합하고 결투하며 꼬여있는 이미지처럼… . 지아 장커는 단순히 위대한 감독이 아니라 시대의 요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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