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눈

하나의 눈

아무나 무작위로 10명을 선정하여 Google Glass와 같은 카메라를 눈에 쓰게 해보자. 그리고 이들에게 같은 방 안에서 하루 동안 지내도록 부탁을 해보자. 그리고 하루가 지나 그들의 카메라에 찍힌 영상을 비교해보자.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같은 공간에서 살았음에도 그들의 영상은 서로 전혀 다른 구성, 배열, 몽타주로 이루어진 세계를 펼칠 것이다. 같은 물건을 볼 때도 서로 다른 심리 상태, 다른 몸 상태, 다른 각도, 다른 위치, 다른 구도, 다른 맥락에 따라 그것을 다르게 볼 것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순서, 즉 먼저 보고 나중에 보는 순서도 각기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벽과 의자와 창문을 본다면, 어떤 사람은 창문과 부엌과 책상을 볼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바닥만 볼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사람의 얼굴 표정을 먼저 보고 나서 사물들의 위치 파악할 것이다. 방 안에서 방 안 전체를 한 번에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불가피하게 사물들을 선택적으로 취한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사물들의 위치만 바꾸어도 그것들은 전혀 다른 느낌과 다른 의미로 우리 앞에 현시한다. 따라서 방 안의 모든 물건과 사람은 그 10명 모두에게 각각 다른 의미와 다른 느낌과 다른 맥락에서 수용될 것이고, 그렇게 방과 환경 전체는 전혀 다른 총체성을 형성할 것이다. 방 안에서의 하룻밤이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평생을 살아가는 우리는 바로 이런 식으로 각자의 경험과 기억을 형성하면서 몸 속에 그리고 머리 속에 시간을 축적해 간다. 또한 이렇게 해서 쌓아 놓은 경험과 기억은 새로운 경험과 사물을 접할 때 새로운 지각을 형성하고 새로운 환경을 해석하는 필터가 될 것이다. 필터를 통해 어제 보았던 의자와 비슷한 유형의 사물이 오늘도 등장할 것이며(등장해야만 한다), 어제 보았던 사람의 행동과 유사하거나 다른 유형의 행동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발견하게 될 것이다(발견 해야만 한다). 유사한 행위와 상황들의 콜렉션이 형성되면 습관이 생겨나고 이 습관에 대한 반응들로 개인들은 인생 전체에 자신들만의 틀을 잡아갈 것이다. 이것이 주관성이며, 니체(F. Nietzsche)의 세계이다. 복잡계(complex system)에나 속할 이 모든 지각의 요인들을 감안해 볼 때, 저 10명이 “구성한” 각자의 비전을 동일한 세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주관성은 다양체 그 자체이며, 그 무엇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차이의 세계, 세계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니체의 관점주의(perspectivism)에 따르면 모든 것은 관점에 사로잡혀 있다. 관점 안에서만 그리고 관점을 통해서만 세계는 현실화 될 뿐이다. 그렇다면 객관성이란 뭘까? 저 10명 각각의 눈 안에서가 아닌, 그래서 서로 다른 구성과 배열로 서로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는 주관적 비전이 아닌, 그들 밖에서 바라보면서 방 안 전체를 단번에 바라보는, 그래서 저 10명이 잠시만이라도 모두가 일치 단결하여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참된 비전, 혹은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신의 초월적 비전이란 무엇일까? 그 수 많은 관점주의적 주관성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다양의 총화로서의 동일한 세계, 즉 하나의 시간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그 비전을 어떻게 획득할 수 있을까? 누구의 눈으로? 당신의 눈으로? 나의 눈으로? 아니면 당신과 나의 사랑? 아니면 우리 모두의 연대? 아니면 수와 기능과 논리의 비전인 과학의 눈? 아니면 인간적 관점을 벗어나는 기계의 관점, 즉 카메라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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