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물

속물

속물의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면, 그것은 부지런이 아닐까 싶다. 속물은 일찍 일어나고, 일찍자고, 맡은바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뚜렷한 목표 의식으로 일상을 채운다. 속물의 행동 강령은 “부지런!”이다.(부지런한 모든 사람들이 속물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방탕하거나, 게으르거나, 자신의 의무에 의구심이 강한 사람은 속물이 되기 어렵다. 한 사회에서 좋은 직업군이나 상위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속물로 채워진 것은 바로 저 행동 강령에 대한 사기 충천한 의지에 기인한다. 그들의 강령 속에 녹아들어 있는 뚜렷한 목표가 바로 그들이 현재 처해있는 사회적 위상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속물의 가장 최악의 덕목 또한 이 부지런에 있다. 속물은 마주보고 서 있는 앞사람, 함께 앉아 있는 옆사람에게 자신과 마찬가지의 목표 의식과 부지런을 야비한 시선으로 강요한다. 자신이 선택한 부산스런 삶의 고역 때문에 그렇지 않아 보이는 남을 보며 약이 올라서인지, 아니면 그러고 사는 것이 좋아서 기독교인들처럼 전도를 하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열등을 공유하면 분산이나 중화(오히려 배가 되지만)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부지런한 그들은 부지런을 야비한 시선으로 강요한다. 그래서 속물은 전염된다. 헉슬리(Aldous Leonard Huxley)가 아주 적절히 말했듯이, 속물 근성은 “행동을 자극해서 바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래서 속물근성으로 가득찬 사회는 “마치 벼룩이 잔뜩 묻은 개처럼” XX 발광을 한다. 왜냐하면 속물은 사회가 개인에게 강제한 역할, 위계, 계급, 위상 같은 것들이 변함없이 항구적으로 지속될 것이라는 체념을 일상적 삶의 수준에서 받아들이고, 사회를 자연과 동일시하여 이를 자발적으로, 심지어 강박적으로 실천하는 정신상태이기 때문이다. 즉 속물은 느낌(또는 정동)의 차원에서 실행되고 있는 물화된 이데올로기이다. 인류의 문화사 전체를 통해 짐작컨대, 모든 “진정한” 예술가들(헉슬리에 따르면, 예술속물 혹은 문화속물도 있으므로)의 개인사는 속물과의 투쟁사, 아니 희생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속물근성이 흑사병이나 독감보다도 더 심각한 전염병이었던 19세기의 영국, 풍자와 유머로 영국을 치유하기로 마음먹고 새커리(William Thackeray)가 편집했던 잡지 Punch의 1892년 어느 날 삽화에는, 뿌리깊은 ‘상처’를 안고 ‘열등감’으로 살 수밖에 없는 속물의 본질을 잘 담은 한 대화가 수록되어 있다. 한 신흥부르주아 가족이 공원을 산책한다. 딸이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 윌콕스네 사람들이에요. 듣자니 저네들이 우리하고 사귀고 싶어 안달이라던데요? 아는척 할까요?” 그러자 엄마는 딸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우리와 사귀고 싶어 환장한 사람들은 우리가 사귈만한 사람들이 아니란다. 우리가 사귀어야 할 사람들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란다!”(Alain de Botton, Status Anxiety, New York: Vintage Books, 2004.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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