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의 조건

도착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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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manuscrit des 120 Journées de Sodome

사드(Donation Alphonse Francois Sade)의 소설 <소돔 120일>(Les 120 Journées de Sodome)에서는 인간이 취할수 있는 모든 관능적 욕망과 육체적 쾌락의 극단적 예시들을 보여준다. 이 소설은 인간의 방탕한 성욕과 범죄에 관한 이야기 또는 행위 묘사로 채워진 하나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다보면 지루하게 반복되는 서술로 인해, 그리고 육체적 물질적인 것에 대한 지나친 과장과 세부묘사로 인해 독자는 점점 호기심과 흥미를 잃어가며 지루해지고 싫증을 느끼게 된다. 육체와 물질의 관능적인 묘사의 반복은 점점 심해질수록 묘사된 대상에 대해 호기심이나 욕망 보다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 즉 괴로움과 고통만 커질뿐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도착”(perversity)은 물질이나 육체에 대한 싫증과 부정(또는 거부)을 그 조건으로 하는 것 같다. 이 말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면, 물질과 육체에 대해 싫증을 내고 부정할 수 있는 특정 계급의 속성에서 도착의 사회적 기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무슨 말이냐면, 범죄의 사회적 기원은 불우하고 척박한 환경 보다는 그 반대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물질과 육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강박적인 계급 보다는, 그것의 풍요를 누리고, 그것으로부터 싫증을 느낄 여지가 많은 계급에서 성적 도착이 더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지나친 추측일까?

사디스트의 과대 망상, 그리고 그에 따른 분노와 증오가 어디에서 출발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그의 소설에서 “방탕 5번째 날”에 이런 얘기가 있다. 뒤클로 부인은 자신의 방탕했던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지저분한 노파의 발가락의 때를 핥아가면서 쾌감을 느끼는 어느 한 난봉꾼(귀족)의 에피소드를 말한다. 주교는 그 자신 역시 난봉꾼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이한 행동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퀴르발 판사가 “그럼 내가 당신을 직접 이해시켜 드려야 겠군요”라고 말하고는, 늙은 하녀 퍙숑의 “구역질 나는 발을 껴앉고 음탕스럽게” 그것을 맛본다. 그러자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징세청부업자 뒤르세가 이렇게 말한다.

“나로서는 모든 게 이해되는구려. 그러한 불결함을 전부 이해하려면 극도로 즐긴 나머지 무감각 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엄청난 방탕으로 모든 것에 싫증을 느끼게 되면 불결함 까지도 방탕의 대상으로 떠오르는 법이요. 그리하여 즉석에서 그것을 실행하게 되지요. 다들 단순한 것에는 싫증을 느끼고 있어요. 상상력이 화가 나 있는거요. 초라한 방식, 연약한 능력, 정신의 부패는 우리를 증오로 이끈다오.”(사드, <소돔 120일>, 서울: 새터, 1990, 188쪽.)
도착의 조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