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 손택: 해석에의 반대

수잔 손택: 해석에의 반대

한때는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로 잘 알려졌던 뉴요커 수잔 손택(Susan Sontag). 예술에 대한 사랑과 강박의 소유자. 그럼에도 그녀는 자기 스스로 “강박적 모럴리스트”라고 부르길 꺼리지 않았다. 아름다움과 도덕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던 것 같다.

그녀는 예술에 대한 사랑을 분석가나 연구자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감상자 혹은 숭배자로서 감추지 않는다. 예술작품을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마치 애인에 대한 욕망과 관능으로 이해하겠다는 태도이다. 그녀는 이를 예술의 “성애학”(erotics)이라고 부르고 싶어했다. 프랑스인 글쟁이 바르뜨(Roland Barthes)의 예술론의 한 측면인 감각주의와 뉴욕 예술계 특유의 냉소적 분위기가 뒤섞여 (적잖이 속물스러운) 변용을 일으키는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예술작품뿐만 아니라 경험에 있어서의 관능성의 회복, 이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어떤 점에서 볼 때, 그녀가 주장했던 전체 논지는 현대의 복제 산업이 만들어 놓은 불감증에서 느껴지는 불쾌감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그럼에도 그녀는 현대성이 여성을 해방시킨 유일한 시대라고 옹호하기도 하지만).

IMG_1068

그녀는 1966년에 이 불쾌감의 한 몸짓으로, 어쩌면 불쾌감의 근원이라고 판단했던 누군가에게 항변하는 대응시선으로, 맹랑한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그녀를 일약 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해준 에세이 <해석에의 반대>(Against Interpretation)가 그것이다. 여기서 그녀는 해석행위를 불감증을 일으키는 근원으로 규정한다. 그녀의 항변에는 일부분 일리가 없지 않다. 그녀의 말을 들어보자:

” 예술 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해석이란 작품 전체로부터 몇 가지 요소들(요소 X, 요소 Y, 요소 Z, 등)을 뽑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해석의 임무는 사실상 번역의 임무와 같다. 해석자는 말한다. 보세요! 저 요소 X가 정말로 A인 것이 안 보이세요? 저 Y가 정말로 B가 아닌가요? 저 Z가 정말로 C가 아닌가요? [. . .] 해석은 맨 처음 후기 고대 문화에 나타나는데, 이 때는 과학적 계몽주의를 통해 소개된 ‘사실주의적’ 세계관에 의해 신화의 힘과 신뢰성이 깨졌던 때이다. 신화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던 의심—종교적 상징의 ‘그럴듯함’에 대한 의심—이 생기자, 고대의 텍스트는 더 이상 그 원시적 형태로 수용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대의 텍스트와 ‘현대적’ 요구를 화해시키기 위해 해석이 필요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스토아학파는 신들이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자신들의 견해와 일치시키기 위해, 호머의 서사시에 나오는 제우스와 그 떠들썩한 일족의 무례한 행태를 알레고리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제우스와 레토의 부정을 통해 호머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권력과 지혜의 연합이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는 구약의 역사적 이야기를 영혼의 패러다임으로 해석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40년 동안 사막에서 방랑을 하다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출애굽기가 실은 개인 영혼의 해방, 시련, 최후의 구원에 대한 알레고리라는 것이다. 해석은 이렇게 텍스트의 분명한 의미와 (현대)독자의 요구 사이에 불일치를 전제한다. 해석은 그 불일치를 해소하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텍스트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된 상황이지만, 폐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해석은 옛날 텍스트, 즉 너무나 소중해서 개작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텍스트를 보존하려는 급진적인 전략이다. 해석자는 그 텍스트를 실제로 지우거나 다시 쓰지 않고도 그것을 바꾸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그 텍스트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어 단지 텍스트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해석자가 텍스트를 아무리 많이 바꾸어도(또 다른 유명한 예로는, 틀림없이 관능적이기 그지없는 아가서(the Song of Songs)를 ‘영적으로’ 해석한 유대교와 기독교가 있다), 이미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어떤 의미를 읽어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 . .] 이해한다는 것은 해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해석한다는 것은 현상을 바꾸어놓는 것, 그것에 대한 등가물을 찾는 것이다. [. . .] 해석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정하듯이) 절대적인 가치, 시간을 초월한 능력의 왕국에 자리잡은 어떤 정신의 몸짓이 아니다. 인간의 의식이 역사적 산물이라는 견지에서, 해석은 그 자체로 평가 받아야 한다. 어떤 문화적 문맥에서 보면, 해석은 해방적 행위이다. 그것은 죽은 과거를 개정하고 재평가하고 탈출하는 수단이다. 다른 문화적 맥락에서 보면, 그것은 반동적이고, 무례하고, 비겁하고, 답답하다.” (Susan Sontag, “Against Interpretation”, A Susan Sontag Reader, New York, Random House, 1982, pp. 97-98.)

손택의 말을 넓게 생각해보면, 해석은 적든 많은 왜곡이고 기만이다. 해석은 텍스트의 다양성으로부터 해석자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요소만을 잡아내어 자신 쪽으로 끌어 당기는 행위이다. 그래서 해석은 과거의 현재화이고, 차이의 동질화이다. 가령, 카프카의 텍스트를 ‘현대 사회의 소외’라든가 ‘개인의 고독’이라고 하는 한 두 가지의 규정된 관점으로 읽는다든가, 현재의 필요에 따라 역사적 사실이나 영토의 소유관계를 (재평가가 아닌) 현재적으로 규정하고 싶다든가, 그 묘사가 너무나 다양해서 하나의 의미로는 말할 수 없는 브뤼겔(Pieter Breughel)의 작품 <Procession to Calvary> 안에서 ‘십자가 처형’이라는 부분적인 주제에 적합한 몇 개의 장면만을 시퀀스로 떼어내어 그 작품 전체를 성화로 간주한다든가, 연예인이나 스포츠스타 혹은 정치가의 특정 모습만을 담은 스틸컷을 스캔들 기사와 나란히 병치한다든가, . . . 이 같은 모든 정당화 행위들, 즉 현재의 욕망을 투사해서 과거를 왜곡하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개인의 주장과 의지로 환원하기, 전체를 보지 않고 부분만 떼어내어 편집하기, 미리 알려진 교리와 믿음에 기대어 새로운 상황을 규정하기, . . . 를 손택이 우려했던 것은 지식의 정치적 사용에 의한 훼손이다. 이로 인해 예술작품이든 삶이든 그 고유한 관능성과 투명성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해석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아니 해석이 아닌 삶이 존재할까? 손택도 밝혔던 바, “니체가 말하는 해석의 의미”, 즉 삶에는 진리가 아니라 해석만이 있다고 니체(Friedrich Nietzsche)가 말했을 때의 그 해석의 의미를 부정할 수는 없다. 원리상 현재란 새로운 경험들을 맨몸으로 직접적으로 대면해야 하는 상태이고, 이를 해석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예컨대 현대성의 한 진기한 현상으로 볼 수 있는 연쇄살인의 명확한 의미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 안에 미리 결정되어 있는 해답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우리가 가진 지식과 기억을 통해 해석할 도리 밖에.

결국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고, 자신의 필요에 따라 주변을 해석하고, 과장하고, 비유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손택이 하고 싶었던 말은 우리의 전반적인 경향성, 더 정확히 말해 우리의 해석 행위조차 하나의 반성적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해석행위 자체는 시간을 초월한 관점을 소유한 신의 활동이 아니라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즉 해석이란 필요에 의해 자행된, 사실에 가해지는 폭력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해석이 역사의 산물임을 받아들일 때, 해석의 굴레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해석을 반대하는 가운데 그녀는 자신의 ‘성애학’을 특징짓는 술어로 관능성을 말했을 뿐만 아니라, 경험의 “직접성”(immediacy) 혹은 “투명성”(transparency)을 강조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삶에는 해석만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니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삶의 능동적 창조에 관한 것이었지, 삶 자체를 어떤 혼탁한 의견에 의한 왜곡과 기만이라고 정의한 것은 아니었다.

 

수잔 손택: 해석에의 반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