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적 에피스테메로서의 지배권

정동적 에피스테메로서의 지배권

수로만 보면 피지배자가 지배자를 압도하는 것처럼 보이고, 선량한 피지배자가 악랄한 지배자를 그토록 증오하는데도, 어째서 지배관계는 여전히 존속하거나 더 강화되고 있는 것처럼 보일까? 지배자의 위상에 도달하기 위해 투쟁하는 장으로서의 ‘지배권'(支配圈, sovereignty) 전체가 유지되는 근본적인 심리학은 무엇일까? 심리학의 대가 니체(F. Nietzsche)에 따르면, 그것은 지배자의 힘이나 피지배자의 무지 때문이 아니라, 도덕과 처벌로 이루어진 인간 관계 속에서 개인들이 겪는 쾌감과 고통의 함수에 기인한다.

그의 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도덕의 목표는 도덕적인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도덕적인 인간이란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는 인간이며, 자신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자기의 의지 또는 미래를 약속 할 줄 아는 인간이며, 도덕이 요청하는 행위 양식을 자율로서 이해하고 실천하는 인간이다. 책임과 의무가 자신의 존재 양태로서 정립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의 힘과 의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인간. 도덕이 양성하려는 완성된 인간이란 바로 주권적 개체(sovereign individual)이다. 그러나 몇 가지 조건이 따른다. 책임이 있는 인간은 양심을 가지는 인간이며, 미래를 약속하는 인간은 예측 가능한 인간이며, 도덕을 하나의 자율로서 이해하고 실천하는 인간은 기억력이 좋은 인간이다. 주권적 개체를 양성하는 도덕은 세 가지의 조건을 필요로 한다. 왠지 미안한 마음(양심과 죄의식 즉 유죄임의 자백), 행위의 규약(약속, 다짐, 의지의 지속), 그리고 남다른 기억력은 앞의 두 조건의 조건이며 동시에 종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둔하고 경박하고 찰나적인 인간이 어떻게 해서 스스로 미안한 마음이 들어 미래의 행위를 다짐하고 그것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것인가? 어떻게 해서 자백과 다짐의 자국을 그의 마음 깊숙이 새겨 넣을 수 있을 것인가? 무엇이든 기억에 남으려면 고통이 필요하다. 가장 오랫동안 남아 있는 자국이란 결국 뜨겁고 따갑고 쓰라린 것이다. 고통과 기억이라는 기초적인 심리적 도식으로 부터 형벌이 태어난다. 엄숙하고 무거운 마음에 어김없이 동반되는 고통스러운 기억들, 희생 제의, 고문과 형벌, 금욕주의, . . . 이 모든 절차들은 고통의 재생을 위해 기억이 필요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잔인한 고통을 필요로 했다. 건망증을 치료하기 위해, 순간적인 감정과 욕망에 사로잡힌 노예의 뇌리에서 사회적 공동 생활에 필요한 규정들이 잊혀지지 않도록, 야만적인 본능과 추한 언행의 통제를 위해, 형법이 인간의 마음 속에 지워지지 않는 어떤 이미지를 아로새긴 것은 다름 아닌 고통을 통해서 였던 것이다. 신체의 일부를 돌로 치는 형벌,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 삶아 버리는 형벌, 불로 지지는 형벌, 어떤 단단한 이(異)물질을 그의 몸 속으로 쏘아서 죽이는 형벌, 밧줄에 목을 매다는 형벌, 태생적 죄인을 의미하는 붉은 색 십자가 낙인을 마음속에 깊숙이 새겨 넣는 창세기적 형벌, 선량함과 겸손과 예절이라는 이름으로 이리저리 따돌려가며 개인을 밑도 끝도 없이 주눅들게 하는 형벌, . . . 이들은 모두가 “어째서 당신은 미안해 하지 않는가?”라고 추궁하는 문화 저변에 퍼져있는 도덕적 정념의 육화이다. 이 문화는 처벌의 광경이 발산하는 뜨거운 빛을 내면 깊숙이 하나의 인상으로 새겨 넣을 관객을 필요로 한다. 형벌에는 연극과 축제의 요소가 참으로 많이 들어 있다고 니체가 말한 것은 이런 뜻이었다.

잔인한 문화에는 희생자 뿐만 아니라 잔인한 종류의 인간 역시 존재한다. 도덕적 인간이 되기 위해 고통을 받아들이는 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주고 고통을 즐기는 자도 있다. 높이 쳐든 채찍 아래 고통과 쾌락은 유착한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쾌감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경험적으로 볼 때 처벌은 오로지 악행을 범한 자의 책임 때문에 가해진 것만은 아니며, 유죄인 사람만이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전제 아래 행해진 것도 아니다. 니체에 따르면 처벌이란 본질적으로 피해자라고 간주된 자가 가해자라고 간주된 자에게 가하는 분노에 다름 아니다. 직접적으로는 재산상의 손해나 신체 상해 같은 구체적인 물적 피해 뿐 아니라, 불쾌감을 일으키는 거만한 태도, 인종적 편견에서 오는 불결함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감정적 동요의 사회적 표현이 형벌의 기원일 것이다.

니체는 고통과 분노가 법(도덕)의 형식으로 전이된 예를 ‘채권자’와 ‘채무자’의 배상형식을 통해 해설하였다.누군가에게 손해를 입힌 자(채무자)는 피해를 입은 자(채권자)의 고통을 보상하고 그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혹은 부채 상환 약속의 신용을 얻기 위해, 혹은 그 약속의 진지함과 신성함을 보증하기 위해, 그리고 그 책임과 의무를 자신의 양심에 새겨두기 위해, 예컨대 자신의 재산이나 신체의 일부 혹은 처(妻)나 가족 심지어는 목숨을 저당 잡힐 것을 맹세한다. 저당물은 보다 소중한 것일수록 적합할 것이다. 한편 채권자는 손해의 고통을 보상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보증 받는다. 보상은 주로 손해에 상당하는 금전이나 토지 혹은 그 외의 소유물이 될 수도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손해나 피해를 고의로 가할 수도 있다. 고문을 가하거나, 모욕을 주거나, 샤일록(Shylock)이 안토니오(Antonio)에게 그랬던 것처럼 육체의 일부를 베어내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받은 고통을 되돌려 줄 수 있는 권리. 배상이란 바로 물적인 또는 심적인 복수의 권리를 말한다. 채권자가 가지는 자신의 손해에 대한 보상은 고통을 줄 수 있는 자격이며 그 자격으로부터 발생하는 쾌감을 누릴 권리이다. 타인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형벌권, 채무자를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집행권, 타인의 불행과 고통을 볼 수 있는 관람권은 지배의 자격이고 권리이며, 그 쾌락이다. 무력한 자에게 마음껏 휘두를 수 있고,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자격, 타인의 불행을 보며 느끼는 우월감, 니체가 그리스도적이라고 불렀던 동정과 연민, 이 모든 쾌감은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이 누릴수록 그 낙차는 더 커진다. 채무자에 대한 자격을 통해 그는 지배권에 참여한다.

따라서 지배자란 국왕도, 귀족도, 자본가도, 남성도, 영국도, 미국도, 유럽도, 아버지도, 관료도 아니다. 도식화된 지배주체의 가시성을 통해서는 지배권을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의 행위에서 미세한 숨소리까지, 삶의 양태 전반을 지배의 구도로 견인하는, 그래서 어김없이 우리 모두가 스스로 지배의 무의식을 실천하고, 불평과 불만과 불면(不眠)의 테마인 채권자의 위상에 도달하기 위해 생활 전반에 걸쳐 추구하는 경향으로서의 쾌감, 즉 ‘정동적 에피스테메'(affective épistémè) 내부의 지배권이 문제인 것이다.

(2007/5/14일자 <문예노트>에 실렸던 “지배권의 향락”을 수정함)

 

정동적 에피스테메로서의 지배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