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 관념과 공통 개념

추상 관념과 공통 개념

스피노자 철학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논제는 “추상관념”(abstract concepts)과 “공통개념”(common notions)간의 본성적 차이라고 들뢰즈는 지적한다(Deleuze 44). 이 둘의 차이를 나누는 것은 신체들과 관념들의 결합과 해체의 양태를 나누는 것이다. 또한 이 나눔은 초월성과 내재성으로 갈라지는 공통성의 유형을 나누는 것이기도 하다.

추상관념은 존재의 초월적 이해이며 존재를 초월적으로 구성한다. 추상관념은 신체들간의 관계에 조응하는 관념이 아니라 관념들간의 관계에 조응하는 일치된 관념을 의미한다. 즉 존재 내재적 관념이 아니라 외재적이며 초월적인 관념이다. 이것은 존재가 신체들의 결합과 해체의 관계 양태와 동일하다는 전제에 근거한다. 신체에 외재적인 관념은 신체들의 공통성이 아니라 관념들의 일치에 의존하기 때문에 추상적이다. 마찬가지로 추상관념은 상상으로 존재를 이해하기 때문에, 하나의 신체가 다른 신체와 맺는 정동적 관계는 사유에서 배제하고, 대상의 내적 구조나 단일한 하나의 원리 또는 부분과 전체의 유기적 체계만을 사유한다. 이로써 신체들의 관계로부터 발생한 결과(효과)를 우연적인 유사성으로 자의적으로 유추하고 연상하여 허구적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추상관념과 허구는 상호 의존적이다.

추상관념은 보편적일 수 없다. 그것이 허구적 이미지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보편성 자체가 구체적인 존재 양태들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것은 존재가 보다 많은 신체들간의 관계에 적합한 공통성을 가질 때이지, 일치된 하나의 관념에 모든 존재가 포함되거나 유사한 이미지를 가지기 때문이 아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이것이 ‘관념'(concepts)과 ‘개념'(notions)의 차이이다. 보편적 개념은 신체 외적으로 ‘주어진’ 상위의 이미지가 아니라 신체들간의 내재적 관계를 통해 ‘발생’하는 이미지이다. 보편성은 의식이 알고 있는 공통성이 아니라, 신체가 반응하는 양태로서의 공통성이다. 따라서 신체에 근거를 두지 않는 추상 관념은 일반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속하지도 않는다.(그렇다면 기하학적 존재나 그 원리들은 어떤가?)

스피노자주의는 존재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외면적인 특징이나 기능적인 구조를 통해 그들을 분류하지 않고(가령, 강, 종, 속, 류 등에 따른 생물학적 개체들의 분류), 정동을 촉발하거나 촉발되는 능력, 신체적으로 감응하는 능력에 따라 분류한다. 이를 위해서는 각각의 존재자들에 고유한 능력들이 서로의 관계를 통해 어떻게 표현하고, 어떻게 서로 닮아가는지(similarity)를 파악해야 한다. 즉, 관념의 일치가 아니라 신체 능력의 공통성에 따라 결합하고 해체되는 내적 양태들의 이해. 이런 점에서 강, 종, 속과 같은 생물학적 분류는 자연 안의 모든 개체들을 초월적 규준 아래 배치한다. 특정 구조와 관념을 공통적으로 소유한 개체들의 집합. 초월적 규준은 존재 자체가 아니라 ‘존재의 개념’이며, 존재하는 것들의 표면적 유사성(likeness)으로 유추된 하나의 모델이다. 개체들은 이 모델에 적합한가 적합하지 않은가의 여부로 판별된다. 따라서 개체들은 정산과 비정상, 완전함과 불완전함과 같은 비교의 관념에 의해 분할된다. 완전성과 불완전성의 관념은 사유의 양태이지 존재의 양태가 아니다. 이로써 스피노자의 윤리학에서 제시하는  적합한 관계의 두 수준이 있는데, 하나는 동일한 규준 혹은 추상적 허구로서의 모델에 기초한 유사성의 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모델을 전제하지 않고 전적으로 관계를 맺는 신체들간의 공통성, 정동을 촉발하는 능력들의 법칙에 따라 배열되는 양상에 기초한 상호 닮음의 관계이다.

또한 스피노자주의는 사물을 수(number)로서 다루지 않는다. 수는 실제하고 있는 사물들의 양태에 적용할 경우 추상적 관념의 매개가 된다: “수는 상상의 보조자”(같은 책 46)이다. 무엇보다도 수는 ‘실체'(entity)를 표현하지 못한다. 실체는 무한한 속성(attribute)을 가지지만, 그 무한성이란 속성들의 다수성(plurality)에 기반을 둔 무한성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실체를 표현할 수 없는 수는 그 자체 스스로를 현시할 수 없다. 수는 속성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단지 다른 수들과의 양적 차이에 의해서만 그 자신을 현시하며, 유비를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자기 자신의 속성을 가지지 않는 수는 구체적일 수 없으며 추상적이다. 수가 언제나 상상을 불러들이는 이유가 이것이다. 자연이 수에 의한 상상으로 매개된다면(예컨대, “이것은 ~ 종류에 속한다”, 또는 “이것은 ~ 구성 부분들로 이루어졌다”와 같은 진술), 그것은 허위 이미지의 재현으로서만 기능할 뿐이며, 그 무한함은 양적 다수성으로 제한될 것이다.

“자연을 구체적으로 보면 어디에서든 무한을 발견하게 된다. 반면에 [자연을 이루는] 부분들의 수를 추리하는 방식으로는 무한함을 발견할 수 없다. 2, 3, 4, … 를 통하지 않고도 즉각적으로[직관적으로] 무한한 속성들이 긍정될 수 있는 실체도, 무한히 많은 부분들을 가지는 존재 양태도, [수를 통해서는] 무한하지 않다.”(같은 책 46) [ ]는 인용자의 주석.

<참고문헌>
Deleuze, Gilles. Spinoza: Practical Philosophy. trans. Robert Hurley. San Francisco, City Lights Books, 1988.
Spinoza, Benedict de. A Spinoza Reader. ed &trans. Edwin Curley. New Jersey, Princeton UP,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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