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 드래곤과 파산형 회생

더블 드래곤과 파산형 회생

엄밀한 의미에서 뉴스와 영화를 명확히 구별 짓기는 쉽지 않다.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때와 장소에 따라 관행처럼 시청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이 뉴스 혹은 영화라고 습관적으로 판단할 뿐이다. 어느 쪽이 더 객관적이지도 않고, 어느 쪽이 더 낭만적이지도 않다. 감독들은 아이디어를 뉴스 매체에 의존하기도 하고, 기자들은 영화를 보면서 머릿속에 담아두었던 그림들을 사건에 투사하기도 한다. 뉴스를 보거나 읽다 보면 기자의 내레이션이나 카메라의 구도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형태를 취하며 우리의 시야를 짓누른다. 간혹 뉴스를 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저 기사를 영화나 소설로 만들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어김없이 보도되고 있는 화면 속의 그 사건-사실의 저편에 있는 더 커다란 어떤 서사나 음모가 화면 밖으로 펼쳐진다. 전말을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느낄 때만큼 의욕적일 때도 없다. 뭔가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고 싶어지거나, 열정적인 에세이를 쓰고 싶어지거나, 그것도 아니면 당장에 친구를 불러 수다라도 떨고 싶어질 때처럼, 우리는 뭔가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쉽게 흥분한다. 그러나 실은 아무것도 모른다면?

지금 내 앞에는 사진 몇 장이 놓여 있다. 최근 뉴스에 보도된 “더블드래곤” 파업 사태를 다루는 인터넷 동영상 기사를, 서버에서 지워지기 전에 컴퓨터 스크린 샷으로 찍어 놓은 것이다. 동영상에서는 카메라가 공중을 활공하며 건물 옥상을 내려다본다. 옥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요를 따라다니며, 기자는 마치 축구나 마라톤을 생중계 하듯이, 더 정확히는 폐허를 바라보며 명상에 빠진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내레이터처럼 막 벌어지고 있는 진상을 조목조목 되풀이 한다. 컨테이너가 시위자들이 있는 쪽으로 접근했다느니, 쇠파이프로 경찰 한 명을 잡고 마구 내려친다느니, 검은 연기가 옥상 저편에서 솟아난다느니, 폭발물의 폭음이 터지기 시작한다느니, 도망가는 무리를 경찰이 뒤쫓고 있다느니, 이 편 옥상에선 도망가는 무리에 대고 체류탄을 쏘아댄다느니, . . . 나즈막히 들려오는 진지한 목소리에 도취되어 TV를 보는 우리들은 그 소요와는 무관한 ‘회색천사'(흰색과 구분이 거의 안 되는) 마냥 저 연기나는 옥상 위의 불행을 멀리 공중에서 바라보며 혀를 찬다. 혀를 차는 순간 쫓고 쫓기는 양자 모두다 무가치하고 편협한 당사자들임을 조용히 선언한다.

그러는 와중에 저 영상물에는 무엇인가가, 결정적인 무엇인가가 빠져있는 것이 아닐까 혹은 과도한 무엇인가가 덧붙여진 것이 아닐까 라는 강한 의구심이 떠나지 않는다. 그 의구심을 증명할 수 없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할 수 없을 때, 혹은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어떤 분위기가 주변을 사로잡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육체들의 환각과도 같은 소요들 사이에 웅크리고 있는 혹은 그 변두리의 대기 전체에 엷은 어떤 것이 퍼져있을 때, 우리는 막연하고도 무책임한 뉴스 다큐멘터리 영상에서 빠져나와 소설을 쓰거나 영화를 찍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기업의 노동자도 아닌, 경영인도 아닌, 주주는 더더욱 아닌 내가 저러한 유형의 뉴스를 접할 때, 저 위에서 뛰어다니거나 마음을 졸이며 TV를 바라보는 이들과는 전혀 다른 상상을 하게 되는데, 가령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SF 전쟁물 혹은 과학기술과 그 영향이라는 주제 하에 괴기물 유사한 영상이 떠오르는 것이다. 기업의 구조조정이나 노동자들의 파업이 SF와 가지는 밀접한 관계는 근거가 없는 얘기가 아니다. 때로는 사회학과 경제학의 담론보다도 더 치열하고 구체적인 재현의 역사가 SF에는 있다. 뤼미에르 형제의 『도살기계(Charcuterie Me’chanique)』(1895) 이후, 한동안 SF의 역사는 그 아류들에 의해 돼지와 개의 수난과 희생을 등에 업은 소시지 가공의 역사(개에서 소시지로, 소시지에서 개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기계와 공장 생산체제 그리고 생명(동물과 인간)의 해소될 수 없는 투쟁의 역사가 있다. 많은 SF의 아류문학 혹은 영화들이 있지만, 기계권의 출발 자체가 가지는 역사적 조건을 생각해 본다면, 결국 SF의 정수는 사이언스의 주체인 자본의 꿈과 소외된 노동(삶)의 전쟁이라는 오래된 마르크스주의의 테제들 안에 고스란히 안착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포스트모던 시대에 이는 로봇공학과 우주프로젝트에 의해 범우주적 숭고미학으로 팽창하여 sugarcoating 되고 있다. 그리고 점점 짙어지는 그 그늘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지각에서 점점 희박해진다.

마르크스주의 미디어 논객들이 형식주의를 비판했던 한 가지 이유는 그것이 항상 카메라를 든 사람을 무기명으로 처리하고 만다는 것이었다. 거기서 모든 시선은 비존재적 추상이 될 운명을 피할 수 없다. 누가 바라보는가? 카메라를 든 자는 어디에 있는가? 시선의 무기명 속에서 우리는 이미 카메라의 눈 자체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TV와 라디오 혹은 인터넷 매체의 동영상이나 이미지들을 바라보면서, 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질문 하나를 잊은 채 우리는 미디어에 뛰어든다. 공중을 활공하며 소요를 바라보고 있는 천사 같은 저 누군가의 눈은 결코 화면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의심조차 받지 않는다. 마치 우주 밖에서 포착한 위성사진의 미학과 테크놀로지의 결합된 이미지를 바라보며 신기하게도 내가 그곳의 한 지역에 틀림없이 위치하고 있다고 기하학적 확신을 하듯이, 저 화면에서 쏘고 있는 X선 입자들이 우리의 망막과 신경세포들을 반복해서 두드리는 동안, 최면 효과 같은 총체성의 눈으로 자기를 바라볼 때 만큼이나 우리 자신을 알고 있는것 같은 희열과 확신에 찬 자기상호적 Cogito. 현대 미디어의 특징은 담론적 상호성(discursive reciprocity)의 부재이다. 누구의 말이고, 누구의 시선인지, 담론의 어떤 주체이고 어떤 위치에서, 무엇을 감추려 하는지 드러나지 않는. 주체든 객체든 미디어 환경 하에서의 추상화. 시-감각이 지배하는 포스트모던 기업문화가 발산하고 있는 모호성의 정치학. 그로 인해 미디어와 그 눈을 우리로부터 육탈시키고 그것과 대면하는 어떤 구도를 만들어낼 것, 결국 미디어의 무의식적 주체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기를 쓰고 찾아 나서야만 한다.

더블드래곤 사건에서 특이한 것은 기업 혹은 회사가 완전하게 추상적 무형성으로 우리 앞에 드러났다는 점이다. 틀림없이 뭔가가 벌어지고 있었고, 어떤 가시적인 움직임들이 거기에 있었지만, 그래서 우리는 그 점에 대해 언론 미디어에서 혹은 우리들 서로간에 그 사실에 대해 말을 한다. 실제로 움직임들의 실행자들(주체가 아닌)은 화염병을 들었건, 펜을 들었건, 체류탄 총을 들었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대기 전체에 퍼진 회사의 잠재적 파도에 파묻혀 그것을 위해 싸우고 또 돌진한다. 이상하고도 특이한, 역설처럼 보이지만 실은 너무나도 분명하고 단순한 뜻을 가진 “파산을 통한 회생!”이라는 용어가 주는 압도적인 위협 아래. 문제는 저들이 들락거리며 오르락내리락 해가며, 장악하고 빼앗기고, 육체들을 밀어붙이는 공간으로서, 버려진 농지 아니면 공터인 허허벌판에 건설된 저 공장 건물들이 아니라, 숨을 쉬고 있는 동안에도 연기와 체류 살포액보다도 더 짙은 농도의 선언 혹은 확신을 형성하는 음모이다. 저 용어가 주는 압도적인 위력은, 그것이 “완전하고도 합법적인 해고”를 의미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확신하고 있었던 어떤 것, 다시 말해 그들을 존재하게 하고 그들에게 무모함의 용기를 주었던 프롤레타리아적 Cogito가 자신들이 생각했던 그것이 결코 아니었으며, 이제 완전히 종말을 고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한 것에 있다.

“파산을 통한 회생”에는 기업 주체(누구지?)의 관점에서 바라 본 두 가지의 교묘하고도 비가시적인 제스처와 전략의 결합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는 파업이 불러올 필연적인 결과를 단호하게 선언하고 그 당사자에게 책임을 ‘항변’하는 듯한 효과와 아울러 추후의 사태에 대한 경고의 전략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파괴적 결과를 어떤 식으로든 수습하여 정상적인 상태로 복원해야만 한다는 기업 주체의 도의적 의지를 반영하는 것 같은 제스처를 취함으로써 기업의 사회적 기능과 책임과 사명을 실천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대견스럽게 묘사하면서, 비난 받고 책임을 져야 할 우울한 재앙의 뒤에서 무엇보다도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그것이 회생의 한 형식으로 수용되어 미국(GM의 경우)에서 이미 검증된 것으로, 기업이 본질적으로 무엇에 기반하고 있는 것인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만, 위에서 말한 그 묘사가 미디어에 의해 각색되면서 공장이 세워진 평택 지역에 대한 도덕적 공동체적 책임을 떠맡은 기업의 회생이 곧 주민과 공동체 전체의 회생으로 좋은게 좋은거지 식으로 sugarcoating되어 그 본질적 기반에 연막이 뿌려지는 와중에, ‘파산을 통한 회생’? 그것이 무슨 말인가? 파산신청을 하고 회사의 문을 닫고 일하는 사람들을 해고하면서 도대체 무엇을 회생시킨다는 말인가? 보존되고 살아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라며 까칠하게 찬물을 끼얹으며 궁극적인 질문을 집요하게 던지기도 전에, 내러티브의 반전으로 질문의 요지를 중화하듯이, 과감한 법적 최종결정의 제스처로 그 연막의 뒤에서 약간의 ‘장치변환’ 혹은 ‘기호들의 변환'(가령, 소유주 혹은 법인을 바꾸는 절차)을 통해 보존과 회생을 도모한다는 명목으로 가벼운 문서 뭉치를 손에 들고 드디어 사무실로 돌진하며 그 실체가 등장하는 바로 그 채권 소유주들의 실질적인 경제활동으로서의 치고 빠지는 전략이 그것이다. 기업이 파산을 해야 한다는 선고를 그 스스로 내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변증법적 양날치기처럼 뭔가를 보존하고 들어올려야 한다는 회생의 원칙을 고수한다는 미사여구로, 파산과 회생의 각각의 책임소재가 원래의 자리에 속한 것으로부터 빠져 나오거나 식별이 불가능해지는 가운데 적절치 않은 당사자들에게 배분되고 있는 것이다: 파산은 파업 주동자들에게, 회생은 기업주체 경영인과 그 소유주들에게.

이 분배는 미디어의 SF분위기 화면 속에서 우리가 흔하게 보아오던 어떤 심리적 구도를 형성한다. 한편에는 약자를 환기하는 희멀건한 피부색에 금테안경을 쓴 착하고 선량한 기업 상인의 이미지가 노동자보다도 더 힘들게 땀을 흘리며 살아가는 상인의 긍정적 실용도덕주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고, 다른 한편에는 작업장 옥상에 올라가 돈을 더 달라고 생 떼를 쓰며 위협과 폭력을 일삼는 빨간 마후라를 두른 영업 훼방꾼들의 저속한 이미지가 건달의 내러티브 비스무리한 상투적인 미디어 구도에 의해 화면 속에서 끊임없이 우리의 주관적 회로를 고착시킨다. 미디어가 주는 메시지는 파업이란 여전히 어떤 훼방, 철없음, 이기심,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철회될 수 밖에 없는 쥐불놀이 혹은 할로윈처럼 맹목적 연례 이벤트의 이미지일 뿐이라는 점이다. 회생을 염원하는 반복적인 코멘트(“과연 더블드래곤이 회생될 수 있을까요?”) 속에는 이미 참담한 심정으로 쏟아내는 초과 데시벨의 어떤 비난과 질책이 있다. 한 가지 문제는 폭도들의 출처가 분명치 않은 외부인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회사의 파산을 주도하고 그 법적 소유관계를 기입한 문건을 쥔 기업주체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파산의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이며, 청산에서 남은 잔여 자산의 분배 혹은 변제절차의 몫에서조차 우선순위에서 배제될 것이다. 실상 ‘파산을 통한 회생’의 의미와 가치 역시 이 우선순위에 비례하여 그 양이 달라지는 용어일 뿐이다. 그렇다면 회생의 주역은 누구란 말인가? 그리고 지붕 위의 저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어디에서 무슨 이유로 날라와 옥상에 뚝 떨어진 숙주들일까? 아무리 하늘 위에서 천사의 총체적 시선으로 바라보아도 숙주들의 전쟁만 보일 뿐, 파산의 주체이자 회생의 주체, 즉 Alien이 숙주들의 배양과 파괴를 통해 보존하고 싶어했던 바로 그 순수생명은 어디에 있는가?

개인에게 있어 돈이란 사물(성)을 추상화하는 가장 보편적 형식이다. 행복이든 사랑이든 삶의 활력이든 이러한 추상적 가치들은 사물 그 자체로부터는 발생하지 않는다. 물질과 사물에 둘러싸인 우리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들로부터 추상적 보편성을 끄집어내야 할 것이고, 그럴 능력이 없다면, 사물 그 자체를 하나의 추상적 가치로 만들 필요가 있다.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사용할 수도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보편적 실재인 냥, 우리는 사랑과 행복과 능력을 무한하게 약속해줄 것처럼 보이지만 매번 우리를 빠져나가는 보편적 대리물로서의 화폐를 욕망한다. 화폐에의 욕망이란 사물의 무한한 되돌아옴을 보증해주는, 고갈되지 않는 사물의 샘을 소유하는 길이다. 물건이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추상적 가치 자체라고도 할 수 없는 돈은 그런 식으로 의심되지 않는 가치로서 우리의 무의식이 되는 것이다. 파산을 통한 회생에서 우리가 목격한 것이 바로 기업과 기업주체 그리고 우리의 이러한 추상적 관계이다. 회사는 터전이나 특정한 형태의 삶의 장소가 아니라, 자본과 이윤의 이름으로 모든 사물적 관계를 무한히 가능하게 해주고 지역사회 전체를 구원해 줄 것처럼 약속을 해주며, 여기저기로 숙주들을 찾아 떠도는 이해 당사자들의 보편적 화폐이며 순수생명을 닮았다. 이를 온전히 보존하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성공적인 경제와 성공적인 (생명)윤리의 달성에 버금가고(“과연 더블드래곤이 회생될 수 있을까요?”), 그 추상적 교환의 실천 속에서 왔다 갔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어느새 합법적 해고든 경제-합리적 구조조정이든 자장가처럼 파도처럼 진통의 효과를 내며 법인의 이름으로 중화되기에 이른다.

공장에서 돌아가는 컨베이어벨트와 그 앞에 죽 늘어선 숙주들의 그림과 유사하게도 사회 전체의 컨베이어벨트와 그 사이사이에서 부대끼는 숙주들의 그림이 있다. 숙주들은 작업장이든 가정이든 지역사회든 아니면 무슨 무슨 청사든 할당된 공간에 붙박여 있고, 이들 안에서 생명을 키워 살아가는 세계령은 바람처럼 은유처럼 떠돌아다니며 정치적 법적 문화적 숙주들을 찾아 선회를 하는 가운데, 그를 불러들이기 위해 실행의 대리인들 그리고 주술인(株術人)들은 서로 간에 인수, 매각, 합병의 무가치하고도 야만적인 피의 강신제를 치른다. 지방(紙榜)을 대체함으로써 새로운 신주와 제주가 들어서면 이 변태적인 형태변이 속에서 지붕 위의 숙주들은, 매 순간 요철을 바꾸어가며 접속단자를 선회하여 종잡을 수 없는 감기 바이러스와 전쟁을 벌이듯이, 실은 세계령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지되는 적은 언제나 그 대리숙주들 뿐이다. 지각할 수는 없지만 가공할 만한 대기전체의 괴물적 기운이 옥상에서 버티고 있는 배제숙주들에게 으르렁거리며 달려든다. 그 기운을 등에 업고 하이테크 살상 장비들을 장착한 전경과 여타 터프가이 스타일 유니폼의 전사들이 크레인에 매달린 컨테이너를 참호 삼아 화염방사기 모드(제작자 혹은 주문자의 욕망을 반영하는)의 물 대포와 가스를 직격으로 쏘아대고, 제대한지 이십 년도 넘은 중년의 배제숙주들은 그들에 맞서 깡마른 다리로 휘청거리며 돌진과 후퇴를 반복한다. 이 양자진영의 숙주들을 둘러싼 대기에는 타오르는 연기보다도 홀가분하게 여기저기에 공통으로 퍼지는 세계령의 열기가 이들을 압도한다. 물론 대리숙주 뿐만 아니라 실행의 주체숙주들이 있다. 그러나 모두가 나름대로 업주이자 상인이므로 누가 더 주체이고 누가 더 객체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워졌으며, 완전히 뒤섞여 한 몸에 머리가 둘 이상인 더블드래곤의 이미지로 서로를 잠식하고 서로를 태우고 있는 것이다.

일면 SF는 자본의 꿈 내용으로 보인다. 가령 로봇공학의 후원자이자 수혜자는 자본일 뿐만 아니라, 요제프(Joseph Čapek)이든 카렐(Karel Čapek)이든 차펙 형제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다름 아닌 노동 소외였던 것이다. 아시모프(Isaac Asimov)는 1941년 자신이 정식화한 로봇공학의 원칙(인류를 위한! 인류에 의한! 인류의!)을 도구를 정당화 하는 원칙으로 확대시켰는데, 도구에 관한 이 원칙은 자본의 노동에 대한 무의식적 시선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도구는 위험하지 않아야 한다! 도구는 효율적 기능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도구는 망가져서는(friction) 안 된다! 그러나 위험하거나 비효율적이거나 망가진다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 바로 여기에 더블드래곤 사태가 가지는 어떤 한계점, 즉 우리가 다소 구질구질하게 우정 어린 미련을 두고 티격태격 하기도 했던 주제, 인간과 노동 그리고 인간과 자본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오래된 이상적 연관성의 한계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왜냐하면 한 쪽에서는 문서를 쥔 희멀건한 범생 스타일의 블레이드러너가 은행 문을 박차고 나와 장부기록 제거를 위해 법원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반면, 다른 한 쪽에서는 무장한 터미네이터가 물리적 제거를 위해 헬리콥터와 컨테이너의 줄타기 활극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차없이 완전하게 제거되는 비참 속에서 마후라를 둘러 얼굴을 가려가며 여전히 자신의 미디어 정체성을 의식하던 배제숙주들은 그 자신의 사회적 본질이 단숨에 드러나는 순간을 목도하게 된다. 도구의 명시적 폐지 그리고 물리적 제거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는 순간 벨트시스템을 전환하여 새로운 장착과 생산라인 배열과 같은 트랜스포머식 형태 기능 전환과는 수준이 완전히 다른 방식의 완전제거. 이때 법은 세계령의 가장 막강한 전사가 된다. 왜냐하면 제거가 더 이상 약육강식의 야만이나 약자에 대한 강자의 억지와 폭력이라고 하는 외부적 사안이 아니라 ‘합의’라고 하는 계약상의 절차로서 우리가 이미 참여하여 서명한 가운데 도출된 결과들을 묵인하도록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법의 이름으로 실행되는 내적 정당화이기 때문이다.

미디어의 화면 속에서 파업은 이제 네트워크로 연결된 기업망과 기업을 위시한 지역 경제망 그리고 기업의 제품을 사용하는 소비자, 그 모두의 심리적 피해와 금융계좌상의 경제적 손실로 공식화되었다. 이제 비로소 SF가 리얼리즘(어떤 리얼리즘인지는 아직 우리가 결정하기 어려운)의 테마가 되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음모는 더 이상 환타지의 주제가 아니라 우리의 삶과 경제를 실현하는 기제임을, 그 양자 중 누가 모델이고 누가 모방인지 구분할 수 없는 실상이 가상과 현실에서 펼쳐지고 있음을 우리가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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