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로하임과 브뉘엘: 엔트로피와 영원회귀

스트로하임과 브뉘엘: 엔트로피와 영원회귀

스트로하임(Erich von Stroheim)과 브뉘엘(Luis Bunuel)의 차이—개체발생론적 하강과 계통발생론적 반복—에도 불구하고 자연주의의 시간은 모든 개체와 종이 저주를 받은 것처럼 퇴락의 길로 추락하는 과정으로 묘사된다. 물론 지속으로서의 시간은 두 개의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진화한다. 하나는 생명의 질서를 보존하고, 개체와 세계를 분할-형성하는 방향이다. 한편 시간은 분할된 개체들을 액체 환경 속에서 해체하듯이 근원적 평형 상태로, 무기물로, 죽음 본능으로, 엔트로피로 되돌린다. 자연주의에서의 시간은 이 후자, 즉 생명체가 그 자신을 형성하고 조직화하기 보다는 송두리째 망쳐버리는 바로 이 하강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스트로하임과 독일 표현주의의 차이를 구분해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표현주의는 빛과 어둠의 투쟁을 다루면서, 인물들의 타락을 주로 어둠과의 투쟁에서 굴복하고 어둠 속으로 빠져버리는 침윤으로 묘사한다. 무르나우(Friedrich Wilhelm Murnau)의 <마지막 웃음>(Der Letzte Mann)에서 주인공은 그림자들과의 싸움과 아울러 깊고 깊은 지하실의 어둠 속으로 가라 앉아 버린다. 표현주의에서 인물의 타락은 곧 어둠 속으로의 타락이며, 타락의 과정으로서의 시간은 빛과 어둠의 투쟁적 구도 속에 종속된다. 그러나 스트로하임은 그 반대이다. 그는 인물들이 타락하거나 근원적 세계로 빠져드는 단계에 따라 빛과 어둠을 배치하고, 결국 엔트로피로의 하강에 따라 빛을 조절한다. 말하자면 빛과 어둠을 시간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어리석은 아내>(The Foolish Wife)에서 부르주아 여인과 장교는 폭풍우를 피해 숲속의 오두막으로 피신한다. 장교는 흑심을 품고 여인에게 성적인 추행을 일삼는데, 시간이 가면서 그 정도가 심해지고 주위는 점점 어두워진다. 결국 칠흑 같은 밤이 되어 장교는 그 틈을 타 잠든 여인에게 달려든다. 그러나 갑자기 길을 잃은 성직자가 밝은 등잔을 들고 오두막 안으로 피신해 들어오자 장교는 하던 일을 멈춘다. 여기서 인물의 충동과 근원적 세계의 출현은 빛과 어둠에 따라서가 아니라 경과되는 시간의 관점에서 제기되고 있으며, 빛과 어둠은 시간의 공간적 배경으로만 기능할 뿐이다. <탐욕>(Greed)에서 두 주인공 맥티그(McTeague)와 트리나(Trina) 역시 어둠과의 투쟁과는 관계가 없어 보인다. 물론 이들이 돈에 대한 물신화와 집착으로 인해 퇴락해가는 과정은 점점 이들을 어둠 속으로 몰아간다. 트리나는 돈을 품은 채 점점 어둡고 고독한 자신만의 침실 속으로 갇혀가고, 맥티그는 폭음의 세계에 빠져 밤에 활보하는 야행성 짐승이 되어간다. 그러나 이들의 타락은 어둠에 압도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밤과 낮이 번갈아 반복되는 가운데 가파른 경사면을 이루는 이들 내부의 기질적 충동에 기인할 뿐이다. 빛과 어둠이 엔트로피의 시간 속에 종속되는 것이다.

브뉘엘의 인물들 역시 퇴락의 과정을 밟는다. 그에게 있어 퇴락은 개체가 아니라 종 전체(전갈, 염소, 인간, 부르주아)로 확장되어 일어나기 때문에 어떤 점에서는 스트로하임보다도 더 강렬하고 거대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브뉘엘은 스트로하임처럼 가파른 경사면을 이루는 엔트로피로의 하강이 아니라 퇴락의 반복으로 점철된다: “브뉘엘에게 퇴락은 [. . .] 곤두박질치는 반복, 영원회귀로 이해된다.”(Gilles Deleuze, Cinema 1, 127) 말하자면 퇴락은 특정 인물의 완전한 파멸의 과정이 아니라, 했던 행위를 또 하고 했던 행위를 또 하는 식의 반복이 지배하는 것이다. 부르주아들은 매번 장소나 상황을 달리하여 만찬을 연다. 만찬은 대부분 근원적 세계를 드러내면서 난장판이 되어 끝난다. 그러나 이들은 또 다시 만찬의 장소를 물색하고 그 안에서 문을 닫아버린다. 그런 점에서 브뉘엘의 퇴락에는 굴곡이나 사이클이 존재한다. 이것은 특정한 개체의 특이한 타락이 아니라 계급 전체 또는 인간 종 전체의 근원적 세계를 드러내며, 이 세계는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심지어 다른 종으로까지 반복되는 특징으로 나타난다. 철멸의 천사(El Angel Exterminador)의 저택에는 인간 부르주아들 뿐만 아니라 동물들이 있으며, 이들의 퇴락은 그에 이어 다른 인물들에 의해 성당에서의 퇴락으로 반복된다.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Le Charme Discret De La Bourgeoisie)에서 매번 실패하면서도 반복되는 만찬, <욕망의 모호한 대상>(Cet Obscur Object Du Desir)에서 매번 실패하면서도 반복되는 부르주아의 섹스 시도, 심지어 <나자린>(Nazarin)에서 새로운 마을들을 떠돌아다니며 신부가 목격하는 인간들의 죄의 반복 등이 이를 예증한다.ᅠ들뢰즈는 브뉘엘의 이러한 반복과 사이클은 스트로하임의 급 하강에 비해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같은 책) 급 하강은 완전한 파멸로 치달으며 끝이 나지만, 되돌아오는 사이클은 실패하더라도 또 다른 가능성을 불러온다. 이런 점에서 브뉘엘의 반복에는 인물들을 긍정하는 요소가 있다. 부르주아에 대한 브뉘엘의 비판은 신랄하고 치명적이지만, 그들의 실망스러운 행태가 반복되는 가운데, 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 어떤 긍정적인 요소가 유머러스한 형태로 발생한다. 욕망의 모호한 대상에서 여인의 육체를 소유하려는 부르주아 남자의 시도는 나중에 애처롭기까지 하고, 심지어 그를 비난하기 보다는 그의 사랑을 인정하기까지 하게 된다. 결국 두 사람은 기차에서 빠져나와 다정한 사이가 되어 걸어간다. 반복의 시간 속에서 인물들을 가로막고 있던 사회적 계급의 요소는 인간적인 친밀함으로 대체되어간다. 이것이 브뉘엘의 충동-이미지에서 볼 수 있는 반복이 불러오는 긍정의 힘이라 할 것이다. 브뉘엘의 인물들은 결국 엔트로피로 치닫지만 나쁜 엔트로피가 아니라 그 나쁜 엔트로피를 배태하고 획책하는 도덕적-사회적 위계들을 무화시키는 순진무구 상태의 엔트로피이다.

어떤 점에서 브뉘엘의 반복은 엠페도클레스의 다원론이 내포하는 결합과 해체의 사이클과 흡사하다 할 것이다. 엠페도클레스는 세계와 역사를 여러 원소들의 결합과 해체의 사이클로 이해했던 사람이다. 원소들은 ‘사랑’이 지배하는 시기와 ‘미움’이 지배하는 시기에 따라, 밀물과 썰물처럼 결합과 해체를 반복한다. 이것이 브뉘엘의 영화에서 우리가 보는 것이다. 반복과 선회 속에서 사랑, 미움, 선한 것, 악한 것, 부르주아, 연인, 거지들, 성자들, 자연 안의 모든 것이 배제되지 않고 중요해진다. 이런 식의 긍정은 스트로하임에게는 없는 요소이다. 그러나 반대로 긍정은 악한 것과 선한 것, 해로운 것과 이로운 것을 구분할 수 없게 함으로써, 악한 것과 해로운 것의 출몰을 허용한다.ᅠ나자린에서의 성직자는 예수처럼 살아간다. 그는 사랑의 실천으로 민중들에게 헌신하며 고행의 길을 간다. 그런 그를 매춘부들이 따른다. 그런데 그는 노동을 하지 않고(따라서 세금도 내지 않고) 자신이 헌신하는 민중들로부터 빌어먹으며 살아간다. 이것은 성직자의 이면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민중을 돌보고 그들의 영혼을 구원해준다고 자처하지만 정작 그들로부터 삶을 구하는 것이다. 나중에 한 노파가 거지꼴을 한 그를 보고 적선을 하자, 한 번도 적선을 받아보지 않았던 그는 갑자기 싫다고 거절을 하면서 수치감에 어쩔줄 몰라 돌아서다가 이러한 자신의 현실을 깨닫는다. 결국 어떤 점에서 그는 해로운 자이다.

이 글은 <씨네마톨로지>(근간)에서 일부를 발췌함.

스트로하임과 브뉘엘: 엔트로피와 영원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