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도타기

궤도타기

감당하기 어려운 사태에 정면으로 맞서거나 적극적인 대응을 하기에는 힘의 한계가 느껴지거나 무모하다고 판단될 때 최선책은 무엇일까? 집채 만한 바위가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아래는 ‘우리 자신들이’ 사는 집이 있다.  바위에 직접 맞서서 막을 힘이 현실적으로 없다. 깨부술 전략이나 도구도 없다. 그런 것들을 마련하기엔 너무 긴박하다. 그동안 뭘 했는지 후회가 된다. 어떻게 해야할까? 그 바위를 등지고 혹은 그 바위에 올라타 바위와 함께 아래로 뛰어 내려가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판단한 사람을 생각해보자. 바위와 함께 구르며 미약하지만 있는 힘을 다해서 그 바위를 다른 쪽으로 돌리거나 속도를 늦추어 보겠다는 심사다. 그는 그렇게 해서 추락의 시간을 유예시키고 파멸을 지연시키려고 한다. 그 유예된 시간 사이에 뭔가를 개입하고, 새로운 요소들을 첨가할 수 있는 가능성들을 모색하기 위해. 그러나 멀리서 보면 그 모습이 마치 바위를 앞장서서 몰고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앞에서 얼쩡거리며 어정쩡해 보이기도 한다. 빠르고 효율적인 위치 선점과 결정이 항상 가능하거나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복잡성 때문이다. 때로는 지체하고 유예시켜, 그 안에서 장 전체의 변화를 모색하는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거부하기 어려운 압박을 버티며 지체와 유예로 시간을 벌기. 그 바위와 함께 구르고 있는 사람의 “의도”를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리고 그 이상 좋은 대안이 없다면, 마을 사람들이 해야할 일은 조언이든 격려든 그가 좀 더 힘이 나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싶다. 감당하기 쉽지 않은 무지막지한 사태 안으로는 들어올 엄두도 못내면서, 혹은 사태가 어느 정도인지도 잘 모르면서, 멀리서 팔짱끼고 앉아, 그가 안간힘 쓰는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바위를 막아야지 왜 등에 업고 아래로 구르고 있느냐며 대책도 없는 진보한 아니 진부한 비판을 쏟아내는 입만 살아서 시끄럽게 집중을 방해하거나, 평소에 그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차에 이때다 싶어 다가가 간지럼을 피우고, 다리를 걸고, 안간힘으로 엉거주춤한 모습을 비웃고, 심지어는 왜 더 빨리 안 뛰냐고 웃기는 말로 힘을 빼며 어리석게 굴 일은 아닐 것이다. 본인이 만들어 놓은 사태도 아닌데 난데없이 떠 안게된 이 무지막지한 바위 덩어리를 등지고 아무 불평도 없이 끙끙대며 속을 앓고 있는 그가 아무리 참을성이 좋은 성격이라 해도, 모르긴 해도 누군가가 더불어서 힘을 좀 덜어 주었으면 하고 바랄 것이다.

행동에는 간혹 미분적 차이를 가지는 동일한 궤도 또는 탄젠트 지대가 존재한다. 마치 반항하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험악한 매질에서 아들을 구하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매를 빼앗아 그 보다 더 험악한 제스처로, 자발적으로, 주도적으로 아들을 내려치는 어머니의 제스처처럼, 거기다 대고 왜 덩달아 매질이냐고 눈치도 없이 욕할 수는 없는(나쁜 어머니가 아니라면), 그 동일한 매질 행위의 질적 차이에 대한 간파를 필요로 하는 접선의 궤도. 물론 아들의 피를 부르는 반항은 어떤 점에서는 무모하면서도 현실적인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위협과 공포에 사로잡혀, 느껴지는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바로 그 공포를 패러디 한다. 그에게는 공포의 도가니만이 현실이기 때문에, 현실에 맞서 현실을 흉내 내면서 현실이 가해오는 압력을 더욱 더 강한 압력으로 되받아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과 합심하여 아버지를 집 안에서 내 쫓아 버릴 수 없는 한, 최소한 저 험악한 매 만큼은 빼앗아 오기 위해 흉내가 필요하다. 접선의 궤도를 타는 것이다. 아들의 흉내가 패러디, 부정, 세력에 의존하는 정체성 정치(the identity politics)라면, 후자의 흉내는 궤도 타기, 또는 지략에 의존하는 정동 정치(the affect potitics)이다. 상황과 입장에 따라, 맥락에 따라, 둘 모두 가능하고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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