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쇄된 체계와 열린 전체

폐쇄된 체계와 열린 전체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1차 대국에서 알파고가 불계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알파고가 초반과 중반에는 굉장한 실력을 자랑했는데, 마무리에 가서 어이없는 실수들을 많이 했다고 전한다. 이에 고무된 이세돌 역시 자만심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자신만이 알거나 혹은 그 자신도 모르는)였는지는 모르지만, 그 역시 실수를 많이 했다고 한다(실수의 요인이나 질적 내용은 서로 다르겠지만).

실수가 많다는 건 우연에 약하다는 말이다. 우연을 처리하는 임기응변의 능력은 짜여진 체계에 따라 일을 과묵하게 수행하는 능력 외에 시간의 결을 섬세하게 파악하고 반응하는 능력이다. 알파고의 “기풍”의 부재도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시간의 흐름(기승전결과 같은)을 직관하고 그 맥락에 따라 자기만의 질서로 모드를 바꾸는 것은 아직은 인간의 직관의 영역에만 국한되는 것인가? 직관은 굵고 단단한 구조와 체계뿐만 아니라 무르고 허약한 잔여, 잉여, 나머지, 주변, 찌꺼기에도 관심의 강도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폐쇄된 체계”와 “열린 전체”의 차이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파고는 실수를 만회해서, 또는 실수에 동요하지 않고 인간을 따돌렸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이는 처음부터 계산된 수 였다고 하고, 어떤 이는 인간과 달리 동요하지 않고 과묵한 수행능력의 승리라고도 한다. 이것은 결국 정확한 계산, 빠른 속도(혹은 힘), 지속력을 발휘하는데 있어 인간은 인공지능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사실이 증명된 것일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정확한 계산, 빠른 속도, 지속력을 방해하는 어떤 “요인”이 알파고 보다는 이세돌에게 더 “영향”을 미쳤다는 것만은 분명해보인다. 그 요인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정동? 몸? 아니면 내면의 소음?), 이 대결은 단순히 “인간”과 “기계”의 싸움이 아니라 그 요인의 최소화, 즉 그 요인과의 싸움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게임은 엄밀히 말해 대결이 아니라 테스트이다. 누가 누굴 테스트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이 이 요인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존재라면, 이 테스트의 발상 자체는 적어도 인간의 어떤 측면을 부정하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보자. 대결의 실체는 무엇인가? 바둑에 있어서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일 뿐 아니라 감정과 충동으로 특이하게 버무려진 육체를 가지는 “이세돌”이라는 한 인간-개체와 그러한 육체를 가지지 않은(따라서 감정이나 충동이 프로그램되지 않는 한 없을 가능성이 높은) “순수 (연산)기능”과의 대결? 이 대결이 가능하긴 한 것인가? 알파고가 누구인가? 인공지능이란 다름 아닌 인간이 소유했던 특정한 능력(논리적 지성)을 떼어내어 최대로 구현한 하나의 기능 외에 그 무엇도 아니다. 부모가 있는 이세돌과 달리 알파고는 부모없는 기계일까? 알파고의 부모는 자본 즉 기업이다. 자본은 인간을 추상과 기능으로 환원하고 싶어한다. 알파고는 인간의 기능이 그 순수한 형태로 추출된 하나의 화신이다. 인간이 추상 그 자체로서 구현된 것이다. 알파고가 최종적으로 숭리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몸으로부터 순수기능을 추출(다운로드 또는 업로드)하는데 성공한 그 부모의 승리일 것이다. 인간 몸의 찌꺼기들이 달라붙어 불안정한 기능보다 더 자유롭고 더 힘차고 더 빠른 순수기능을 인간의 몸에 의존하지 않고 구현할 수 있게 된 그 부모가 꿈꾸는 시대의 승리.

한편 인간의 몸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몸은 이제 효율적인 기능을 수행하는데 있어 적절치 않거나, 거추장스럽거나, 도움보다는 방해가 된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기도 하다. 몸과 기능의 불화. 이것은 이미 채플린(Charlie Chaplin) 시대에 몸 개그의 우스꽝스러움을 통해 목격했던 현대적 인간의 초상이었다. 채플린은 휴머니즘이 희극이 된 시대를 비판했지만, 이번 대결은 채플린의 개그와는 완전히 반대의 관점에서 이 불화를 재연한다. 그런 점에서 이세돌이 이번에 수행한/받은 “테스트”는 누가 더 바둑을 잘 두는 “능력”이 있는가가 아니라 누가 더 “몸”으로부터 자유로운가가 아니었을까? 알파고의 승리를 통해 자본이 증명하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몸에 대한 그 기능의 우월함; 인간은 산업이 요구하는 생산성에 적절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자본의 운동에 비해 도태되고 뒤쳐졌다; 자본이 최대 강렬도로 추구하는 자기 생산적 역량을 육화할 능력이 부족하다; 생체권력의 지배하에서 인간은 불충분한 생산성으로 인해 지탄받아야 한다. “구체적 실존”과 “추상적 기능”의 시대적 대립. 누가 더 계산이 빠른가? 누가 더 논리적인가? 누가 더 멀리 보는가? 이 대립으로부터 우리가 알게 된 것은 구체적 실존으로서의 인간이 현대성(modernity)의 패러다임 안에서 규정되었던 인간성을 벗어나 새로운 존재로 재규정되지 않으면 안 되는 계기 또는 요구가 도래했다는 사실이다.

 

폐쇄된 체계와 열린 전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