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프레임의 외부: 까슈와 태피스트리

프레임에 관한 논의는 자연히 “장-밖”(out-of-field, hors-champ)의 문제로 우리를 이끈다. 들뢰즈에게 프레임과 그 외부의 문제는 지각 가능한 영역과 지각 불가능한 영역, 현실태와 잠재태, 또는 집합과 전체의 구분을 변주한 문제로 볼 수 있다. 베르그송주의자인 들뢰즈는 프레임-외부를 프레임의 “부정”으로 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크리스탈-이미지와 돈

자기를 반성하는 제스쳐처럼 보이는 ‘영화 속의 영화나 영화 제작’이라는 자기반영 이미지에 새롭고 특이한 깊이를 부여해주는 근거는 무엇일까? 이를 정당화해 줄 근거가 없다면 그것은 단지 부차적인 방법이나 형식주의적 유희에 머물고 말 것이다. 영화 제작의 불가능을 그린 벤더스의 <사물의 상태>(Der Stand der

선악의 열매

선악의 열매

스피노자에 따르면 윤리를 ‘금지’와 ‘명령’의 질서(~하지 말라)로 이해하는 것은 자연의 운동과 원인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한 것과 ‘악’한 것을 판별하는 가치의 종교적 결정 역시 존재의 운동과 원인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아담이 열매의 의미를 금지와 명령으로 받아들였다면, 그것은 그가 “신은

의식에 대하여

의식에 대하여

들뢰즈(Gilles Deleuze)가 스피노자의 윤리학에서 도출한 “의식”의 개념은 이러한 것이다. 의식은 어떤 행위와 작용의 결과로서 주어진 실재를 하나의 전체로 이해한다. 그러나 의식은 전체를 이루는 “살아있는 부분들”이 서로 결합하거나 해체되는 관계들의 원인과 본질(원인들의 질서)은 이해하지 못한다. 원인과 본질은 이해하지 못하고 그 결과로서

바둑의 내부와 외부

최소한 동양인들의 생각에 동양은 바둑에 있어서 만큼은 우월한 존재였다. 바둑의 발상지일 뿐 아니라, 그 수두룩한 고수들을 보면 서구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바둑은 체스와 달리 열린 전체를 지향한다. 들뢰즈(Gilles Deleuze)는 <천의 고원>(mille plateaux)이란 책에서 바둑과 체스를 비교하면서, “닫힌 체계”의 체스와 달리 바둑은 “열린

(탈)중심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중심에 사로잡혀 중심에 집착하는 인간. 그리고 중심으로부터 이탈한 인간. 니체(F.W. Nietzsche)를 따랐던 들뢰즈(Gilles Deleuze)는 중심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변신하는 삶을 선호했지만, 전적으로 옳은 생각 같지는 않다. 전자는 중심 자체가 주는 무게를 견디느라 고통스럽고, 후자는 떠돌며 휩쓸리는 세파에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