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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10 배치는 메시지다 (6)
  2. 2006/10/18 미디어와 사이버공간: 왜 미디어는 메시지인가?

사물을 배치하든, 이미지를 배치하든, 아니면 단어나 소리를 배치하든, 일정한 형식의 배치는 의미를 만든다. 배치하는 어떤 사람의 의지나 바램을 나타내기도 하고, 배열된 것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기억을 불러오기도 하고, 그 배치된 특정 모양이 일으키는 어떤 연상으로부터 유쾌함이나 불쾌함을 유발하기도 한다. 나무 아래에 기대어 앉은 사람, 낭떠러지 위에 놓여진 신발, 주먹으로 움켜쥔 붉은 깃발, 머리에 꽂은 꽃, . . . 이 모든 배치들은 특이한 형상과 의미와 정서를 촉발하여, 그로부터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사물들의 배치는 구성, 이미지들의 배치는 몽타주, 그리고 단어들의 배치를 통사(syntax)라고 하는데, 이 모두는 의미를 일으키는 형식적 틀이다. 즉 우리는 배치를 통해 특정한 관계를 형성하고, 그 관계의 한 당사자로서 혹은 관계를 바라보는 관찰자로서 거기에 자신의 바램을 투사하며 살아간다. 맥루한(Marshall McLuhan) 식으로 말해 메시지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 배치를 통한 메시지를 가장 빈번하게 실천하는 분야는 물론 저널리즘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지 알려진 사실들만을 종이에 일정한 형식으로 배열만 했는데도, 우리는 그 뉴스가 정치적으로 좌파인지 우파인지, 혹은 반정부적인지, 친미국적인지 등과 같은 시대적 화두를 판단할 수가 있다.

물론 배치가 교묘하여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교묘함이 더하면 더 할 수록 메시지의 농도는 더 진해지고, 떨쳐버릴 수 없을 만큼 둔탁해지며, 깊숙이 파고드는 무엇인가가 우리의 신체와 관념에 작용한다. 가령, 최근에 주류언론(관치언론)이 자주 사용하는 공포의 배치가 좋은 예이다.


붉은 줄로 표시한 두 기사들은 서로 순서를 바꾸어가며 며칠 동안 등장한다. 이 두 기사의 관계는 물론 "공포"라고 하는 현대적 무의식을 둘러싼 정치적인 문제이다. 배열의 순서만을 바꾸거나 서로 다르게 함으로써, 그 메시지의 방향과 의미는 전혀 달라지긴 하지만 말이다. 중요한 것은 생물학적 공포가 단지 불가피한 재앙 혹은 자연 재해의 이미지로 등장하는 반면에, 그것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대응들의 성격이 암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자연적 혹은 생물학적 재해 그 자체는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면이 덜하거나 거의 없지만, 그것이 사회적 특정 행위들과 연결되면 마치 그 공포가 사회적 행위의 결과인 것처럼 둔갑해버린다. 두 기사가 지속적으로 같이 붙어 다니는 과정에서 우리는 공포의 원인과 결과 혹은 최소한 공포의 강화 혹은 약화의 특유한 관계들을 우리 스스로가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두 기사 어디에도 서로를 지칭하거나 서로를 언급하는 내용을 찾아 볼 수 없는 경우일지라도, 두 개의 공포가 서로 붙어있다는 것 만으로도 굉장한 자장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 그 에너지는 우리의 집단적 꿈과 기억 그리고 거칠고 저속한 이미지의 형태로 우리의 영혼을 잠식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와는 반대로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특정 인물이나 사건 혹은 어떤 이미지를 감추면서 동시에 다른 무엇인가를 들추어내기 위해, 두 뉴스의 배치를 멀리에 두는 경우도 있다.

위 쪽에 배치된 기사는 최근에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는 지방행정도시 문제를 둘러싼 여당과 야당의 충돌이라는 정치적 사안과 관련이 있다. 그 충돌의 와중에 여당 측 한 여자 의원을 위시한 몇 몇 의원들이 야당에 유리한 발언들을 쏟아내고 있는 중이었다(그녀는 지방에 행정도시 추진을 반대하거나 7번 기사처럼 수정을 원하는 여당에 반대한다). 그 여자 의원은 현재 여당의 우두머리 격인 행정수반과 대선 때부터 줄곧 반목과 경계를 거듭해 온 터였는데, 계속해서 수세에 몰리다가, 여당이 패한 얼마 전 보궐선거에서 드러난 여론을 등에 업고 세를 모으기 위해 모처럼의 기회를 이용하여 몇 마디를 한 것이었다. 한편 아래 쪽에 배치된 기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그 여자 의원의 부친이다. 그는 수 십 년 전에 오랫동안 군사독재 정권을 지속해 오다가 자신의 부하에게 총을 맞고 죽은 군인출신 대통령이었다. 문제는 그가 일제식민지 시절 일본 사관학교 출신이었고, 그 동안의 조사에 따라 친일인사로 분류된 서적이 곧 출간될 예정이었는데, 여기에 덧붙여 일제에 혈서로 충성을 맹세한 친일행각 기록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친일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었으므로 특별히 놀랄 것도 없음에도, 난색을 표하며 그의 과거를 다루는 기사를 선택하고 배치한 저 능청! 이 배치의 관점은 역사가 아니라 정치적인 것에 있으며, 이로써 언론사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어떤 메시지, 즉 동떨어져 보이는 두 사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밀접한 관련성을 통해, 헌법 13조 3항에 위배되는 연좌제(緣坐制) 비스무리한 어떤 증오의 도식이 함축되어 있다. 저 배치는 특정 정치인사의 반(反)여당적 일탈에 대한 관치저널리즘의 전형적인 대응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기사 8번을 위에서 내리누르는 7번 기사와 아래에서 치고 올리는 9번 기사, 그리고 10번으로 연결되는 배치의 미학을 보라!

맥루한에 따르면 현대의 미디어에서 빈번히 목격할 수 있는 미디어구도의 전형이 있는데, "나쁜 뉴스"와 "좋은 뉴스"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나쁜 뉴스란 열광, 분노, 공포와 같은 집단적 분출을 조장하는 뉴스이다(정치-문화적 스캔들, 재해, 폭행, 끔찍한 일탈에 관한 기사들). 반면 좋은 뉴스는 이러한 황색저널리즘(혹은 붉은색저널리즘)을 미끼로 특정 집단의 메시지(주로 물건을 파는)를 퍼뜨린다. 나쁜 뉴스가 쏟아내는 무섭고 위험한 이미지가 일련의 경고의 기능을 하는 동안 혹은 그 후에, 다른 한편에서는 그와는 전혀 다른 집단과 세력의 천국의 이미지들이 교차평행편집 스타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모자이크 처리된 거친 다큐멘터리 VCR화면을 바라보며 양미간을 구기고 숨을 헐떡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나 싶으면, 어느새 카메라는 외부소음이 차단된 스튜디오로 들어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깔끔한 용모로 생글거리는 미소 혹은 단호한 표정을 머금은 여자 앵커의 '모범적' 자태를 보여준다(그녀의 자세와 어조와 표정은 해당 언론이 보여주고 싶어하는 도덕과 정신상태 등을 대표한다). 그녀는 아주 대조적인 또 다른 교훈적이고 바람직한 도덕적 실용주의의 세계를 우리에게 소개하기도 하는데, 거기에는 소시민들의 선행과 도덕의 사례들이 간간히 열거되는 가운데, 무엇보다도 그 세계의 정수는 인상 좋은 선한 용모의 배우들이 직접 가리키고 있는 상품의 꿈같은 화사함이다. 이러한 불행과 구원의 교차편집은 어설픈 얼뜨기들을 유인하는 야바위꾼의 상술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 화이트저널리즘의 야바위는 집단의 적개심을 필요로 하는 집권세력의 메시지 또한 어김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선택과 배치. 이것이 저널리즘의 형식적 질서이다. 무엇을 선택했는지(이는 취향을 반영한다).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배치했는지(이는 욕망을 반영한다). 우리가 뉴스를 바라보며 생각하고 찾아야 할 미로는 바로 이 취향과 욕망이다.

Posted by huun

기술 매체는 두 방향의 형식적인 운동을 통해 작동한다. 우선, 그것은 연장(延長)의 속성을 갖는 덩어리를 절단한다. 기계 테크놀러지를 보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매체의 절단 기능은 외면적 방식으로 수행된다. 예로, 자동화된 기계는 사물의 본성과는 관계없는 방향을 따라 대상을 절취한다. 모든 사물은 그 자신의 고유한 결을 잃어버리고, 절단의 외면적 운동과 그 힘의 규격에 의해 재단되는 것이다. 나무는 이제 더 이상 갈라지지 않고 잘릴 뿐이다. 이런 식으로 현대적 공간은 기하학을 재현하고 있다. 휴머니즘의 현대적 표현은 바로 이 힘에 대한 역기능으로 일관되어 왔다. 둘째로, 매체는 절단된 것들을 다시 연결하여 일련의 연쇄를 만들어낸다. 이로써 하나의 자동화의 메커니즘이 출현하는데, 무엇보다도 이 자동화는 자연적 인과성을 결여한 상태이다. 왜냐하면 메커니즘의 요소들은 이미 외면적인 방식으로 절단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연된 관계를 갖는 잘려진 것들이 특정한 연속을 띠기 위해서는 이들의 간극이 얼마나 최소화되는가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기술 매체의 관건은 거리와 간극의 최소화에 달려 있는 것이다. 시간은 이제 속도로 대체되고 공간은 이를 압축이라는 형식으로 표상한다. 베르그송 식으로 말하자면 시간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조차도 지속으로부터 분리되어 공간화 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현대의 미적 표현에 있어 선(線) 특히 직선은 하나의 미덕이 되었다. 현대의 기술매체는 사물의 유기적 연장을 불연속의 연쇄로 치환하고, 이 외삽으로부터 생기는 간극과 균열은 속도의 최대화에 의해 봉합된다. 물질을 생산하는 수단으로서의 생산기계의 자동화는 배치와 순차를 통해 가장 효율적인 공간의 활용, 즉 속도의 최대화를 어떻게 창출할 것인가에 집중한다. 나아가 대중 매체나 컴퓨터와 같은 전자매체가 활용되면서 이 간극은 제로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다시 말해 공간으로부터 시간성이 완전히 제거됨으로써, 세계는 이제 선분이 아닌 하나의 점의 상태가 된다.

매체는 사물과 현상들의 불연속적 연쇄를 만들 뿐 아니라, 이에 대한 우리의 지각패턴을 동시적인 것으로 만든다. 예를 들어 우선 그것은 감각능력들의 종합적 활용을 요구한다(멀티 미디어를 보라). 나아가 그것은 공간적 거리를 종합함으로써, 이 거리에 상응하는 신체 경험의 간극을 현재적 상태로 만든다. 여기서 공간지각은 매체의 속력의 증감에 의존한다(승강기나 자동차를 보라). 또한 매체는 시간적 차이 역시 무한한 현재 속으로 체포해 버린다.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순간이며, 우리의 지각에 포착된 모든 사물들은 일종의 에테르의 상태가 된다. 그런데 사물의 연쇄과정에서 이렇게 시간의 물질적 두께가 제거되고 나면, 다시 말해 지각의 동시성이 발생하여 물질의 운동에 상응하는 지각의 한계를 넘어서게 되면, 자연적 인과성이 절연되어 요소들 각각 자신 안에 어떠한 것도 내포하거나 지시하지 않았던 연쇄 메커니즘은 또 다른 본성을 갖게 된다. 단순한 시간상의 연쇄가 이제는 인과성을 갖는 새로운 내용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맥루한의 다음과 같은 설명을 보자: "가장 위대한 반전이 전자성(electricity)과 함께 나타난다. 이것은 사물들을 순간적인 것으로 만들면서 연쇄를 없앤다. 그리고 이제 순간적인 속도로 인해, 마치 연쇄나 조작과는 아무 관련이 없던 것처럼, 사물들의 원인이 인식되기 시작하는 것이다"(McLuhan 12). 하나의 관점이 어떻게 생겨나는가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맥루한이 언급한 영화매체나 큐비즘도 역시 분절과 연속의 메카니즘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나아가 이것은 특정한 형식의 인식활동을 만들어낸다. 큐비즘의 발생 시기와 근사(近似)한 영화매체는 분할된 컷들의 단순한 기계주의를 넘어 일종의 구조적 환각을 생산하는 장치가 된다.

기술 매체의 운동이 연결이나 이동인 것만큼이나 그 심층에는 절단과 절연이 있으며, 그들간의 재 연결에는 그에 상응하는 사유활동이 있다. 그런데 자르고 봉합하는 종합형식이 동시성을 띠면서, 매체는 세계를 표면적이고 추상적인 운동으로 치환해 버린다. 이러한 매체의 급진적인 변화는 경험 능력들을 신체로부터 박탈하여 그 자신이 대리자가 된다. 매체는 일종의 신체가 되는 것이다. 매체가 인간의 감각능력을 비롯하여 신체일반의 확장인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가상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물질성을 벗어버리고, 과거였다면 반드시 자연적 조건들과 결합함으로써만 현존할 수 있었을 실재성을 그 자체 순수회로로 변형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더 이상 물질의 방해를 받지 않고 효과의 실재만으로도 얼마든지 우리 자신을 연장하고 확장시킬 수가 있게 된다.

맥루한의 관심은 바로 이 매체가 갖는 통합체적인 특성에 있었다. 모든 계열을 합목적성을 띤 사이버네틱 회로망으로 단일화하고 나아가 스스로 실체가 되는 힘. 그는 이 힘이 질료적 경험을 축소하고 추상적 견해와 반응만을 유발한다는 점을 지적한다(주1). 그는 매체가 모든 부분들을 종합하는 원리를 허위적 연결이라고 보았다. 그것이 허위적인 이유는 인식의 실질적 조건인 감각과 지각을 불균형적인 상태로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차적인 문제는 매체에 의해 형성되는 사회적 관념이나 동의보다는, 매체가 이미 갖춘 추상적 운동에 의해 동질화되는 감각과 지각의 패턴들이다. 감각에서 사유로의 이동이 아니라, 동질적인 추상관념으로부터 감각으로의 이동으로 순서가 역전된다: "기술의 효과는 여론이나 개념의 수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서서히 우리의 감각이나 지각패턴을 바꾸어 놓는다. 진지한 예술가만이 오로지 형벌을 받지 않고 무사히 기술과 대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감각의 변화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McLuhan 19).

단일한 회로로 동화된 신체로부터 우리 자신은 자연스럽게 행위나 관념 뿐 아니라 삶 자체를 단일성과 전체성의 효과 아래로 집결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매체는 이미 그 자체 하나의 신호이며 메시지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반응하고 행위하고 사유하도록 강요하거나 권고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 자신의 반응이며 행위이며 사유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매체는 이미 우리 자신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좋거나 나쁘지도 않은"(11) 것으로서 사용이나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좋거나 나쁜 것으로서 우리 자신의 윤리를 결정하는 존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이다.

(1)
"토인비는 영매화(etherialization)라는 개념을 통해 매체의 변형적 힘을 논하는데, 이것은 그가 보기에는 모든 조직이나 기술에서 진보적 단일화와 능률의 원리이다. 대체로 그는 이 형식들이 우리의 감각적 반응들에 적합하지 않게 되는 효과를 무시하고 있다. 그는 한 사회에서 매체와 기술의 효과와 관계하는 것은 우리의 관념적 반응이며, 인쇄기술의 결과는 우리의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문자성이 발달하고 동질화된 사회 속의 인간은 다양한 것과 불연속적인 삶의 형식들에 민감해지지 않으며 감각적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3차원의 망상을 통해 자신의 나르시스적 고착의 일부로서 '비밀스런 관점'을 갖게되고, 블레이크나 다윗왕이 간파했던 "우리가 보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이 된다"는 경구와는 담을 쌓는다".(McLuhan 20)

인용문헌
McLuhan, Marshall. Understanding Media: The Extension of Man. New York: McGraw-Hill,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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