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을 배치하든, 이미지를 배치하든, 아니면 단어나 소리를 배치하든, 일정한 형식의 배치는 의미를 만든다. 배치하는 어떤 사람의 의지나 바램을 나타내기도 하고, 배열된 것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기억을 불러오기도 하고, 그 배치된 특정 모양이 일으키는 어떤 연상으로부터 유쾌함이나 불쾌함을 유발하기도 한다. 나무 아래에 기대어 앉은 사람, 낭떠러지 위에 놓여진 신발, 주먹으로 움켜쥔 붉은 깃발, 머리에 꽂은 꽃, . . . 이 모든 배치들은 특이한 형상과 의미와 정서를 촉발하여, 그로부터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사물들의 배치는 구성, 이미지들의 배치는 몽타주, 그리고 단어들의 배치를 통사(syntax)라고 하는데, 이 모두는 의미를 일으키는 형식적 틀이다. 즉 우리는 배치를 통해 특정한 관계를 형성하고, 그 관계의 한 당사자로서 혹은 관계를 바라보는 관찰자로서 거기에 자신의 바램을 투사하며 살아간다. 맥루한(Marshall McLuhan) 식으로 말해 메시지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 배치를 통한 메시지를 가장 빈번하게 실천하는 분야는 물론 저널리즘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지 알려진 사실들만을 종이에 일정한 형식으로 배열만 했는데도, 우리는 그 뉴스가 정치적으로 좌파인지 우파인지, 혹은 반정부적인지, 친미국적인지 등과 같은 시대적 화두를 판단할 수가 있다.

물론 배치가 교묘하여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교묘함이 더하면 더 할 수록 메시지의 농도는 더 진해지고, 떨쳐버릴 수 없을 만큼 둔탁해지며, 깊숙이 파고드는 무엇인가가 우리의 신체와 관념에 작용한다. 가령, 최근에 주류언론(관치언론)이 자주 사용하는 공포의 배치가 좋은 예이다.


붉은 줄로 표시한 두 기사들은 서로 순서를 바꾸어가며 며칠 동안 등장한다. 이 두 기사의 관계는 물론 "공포"라고 하는 현대적 무의식을 둘러싼 정치적인 문제이다. 배열의 순서만을 바꾸거나 서로 다르게 함으로써, 그 메시지의 방향과 의미는 전혀 달라지긴 하지만 말이다. 중요한 것은 생물학적 공포가 단지 불가피한 재앙 혹은 자연 재해의 이미지로 등장하는 반면에, 그것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대응들의 성격이 암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자연적 혹은 생물학적 재해 그 자체는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면이 덜하거나 거의 없지만, 그것이 사회적 특정 행위들과 연결되면 마치 그 공포가 사회적 행위의 결과인 것처럼 둔갑해버린다. 두 기사가 지속적으로 같이 붙어 다니는 과정에서 우리는 공포의 원인과 결과 혹은 최소한 공포의 강화 혹은 약화의 특유한 관계들을 우리 스스로가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두 기사 어디에도 서로를 지칭하거나 서로를 언급하는 내용을 찾아 볼 수 없는 경우일지라도, 두 개의 공포가 서로 붙어있다는 것 만으로도 굉장한 자장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 그 에너지는 우리의 집단적 꿈과 기억 그리고 거칠고 저속한 이미지의 형태로 우리의 영혼을 잠식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와는 반대로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특정 인물이나 사건 혹은 어떤 이미지를 감추면서 동시에 다른 무엇인가를 들추어내기 위해, 두 뉴스의 배치를 멀리에 두는 경우도 있다.

위 쪽에 배치된 기사는 최근에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는 지방행정도시 문제를 둘러싼 여당과 야당의 충돌이라는 정치적 사안과 관련이 있다. 그 충돌의 와중에 여당 측 한 여자 의원을 위시한 몇 몇 의원들이 야당에 유리한 발언들을 쏟아내고 있는 중이었다(그녀는 지방에 행정도시 추진을 반대하거나 7번 기사처럼 수정을 원하는 여당에 반대한다). 그 여자 의원은 현재 여당의 우두머리 격인 행정수반과 대선 때부터 줄곧 반목과 경계를 거듭해 온 터였는데, 계속해서 수세에 몰리다가, 여당이 패한 얼마 전 보궐선거에서 드러난 여론을 등에 업고 세를 모으기 위해 모처럼의 기회를 이용하여 몇 마디를 한 것이었다. 한편 아래 쪽에 배치된 기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그 여자 의원의 부친이다. 그는 수 십 년 전에 오랫동안 군사독재 정권을 지속해 오다가 자신의 부하에게 총을 맞고 죽은 군인출신 대통령이었다. 문제는 그가 일제식민지 시절 일본 사관학교 출신이었고, 그 동안의 조사에 따라 친일인사로 분류된 서적이 곧 출간될 예정이었는데, 여기에 덧붙여 일제에 혈서로 충성을 맹세한 친일행각 기록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친일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었으므로 특별히 놀랄 것도 없음에도, 난색을 표하며 그의 과거를 다루는 기사를 선택하고 배치한 저 능청! 이 배치의 관점은 역사가 아니라 정치적인 것에 있으며, 이로써 언론사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어떤 메시지, 즉 동떨어져 보이는 두 사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밀접한 관련성을 통해, 헌법 13조 3항에 위배되는 연좌제(緣坐制) 비스무리한 어떤 증오의 도식이 함축되어 있다. 저 배치는 특정 정치인사의 반(反)여당적 일탈에 대한 관치저널리즘의 전형적인 대응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기사 8번을 위에서 내리누르는 7번 기사와 아래에서 치고 올리는 9번 기사, 그리고 10번으로 연결되는 배치의 미학을 보라!

맥루한에 따르면 현대의 미디어에서 빈번히 목격할 수 있는 미디어구도의 전형이 있는데, "나쁜 뉴스"와 "좋은 뉴스"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나쁜 뉴스란 열광, 분노, 공포와 같은 집단적 분출을 조장하는 뉴스이다(정치-문화적 스캔들, 재해, 폭행, 끔찍한 일탈에 관한 기사들). 반면 좋은 뉴스는 이러한 황색저널리즘(혹은 붉은색저널리즘)을 미끼로 특정 집단의 메시지(주로 물건을 파는)를 퍼뜨린다. 나쁜 뉴스가 쏟아내는 무섭고 위험한 이미지가 일련의 경고의 기능을 하는 동안 혹은 그 후에, 다른 한편에서는 그와는 전혀 다른 집단과 세력의 천국의 이미지들이 교차평행편집 스타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모자이크 처리된 거친 다큐멘터리 VCR화면을 바라보며 양미간을 구기고 숨을 헐떡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나 싶으면, 어느새 카메라는 외부소음이 차단된 스튜디오로 들어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깔끔한 용모로 생글거리는 미소 혹은 단호한 표정을 머금은 여자 앵커의 '모범적' 자태를 보여준다(그녀의 자세와 어조와 표정은 해당 언론이 보여주고 싶어하는 도덕과 정신상태 등을 대표한다). 그녀는 아주 대조적인 또 다른 교훈적이고 바람직한 도덕적 실용주의의 세계를 우리에게 소개하기도 하는데, 거기에는 소시민들의 선행과 도덕의 사례들이 간간히 열거되는 가운데, 무엇보다도 그 세계의 정수는 인상 좋은 선한 용모의 배우들이 직접 가리키고 있는 상품의 꿈같은 화사함이다. 이러한 불행과 구원의 교차편집은 어설픈 얼뜨기들을 유인하는 야바위꾼의 상술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 화이트저널리즘의 야바위는 집단의 적개심을 필요로 하는 집권세력의 메시지 또한 어김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선택과 배치. 이것이 저널리즘의 형식적 질서이다. 무엇을 선택했는지(이는 취향을 반영한다).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배치했는지(이는 욕망을 반영한다). 우리가 뉴스를 바라보며 생각하고 찾아야 할 미로는 바로 이 취향과 욕망이다.

Posted by huun

엄밀한 의미에서 뉴스와 영화를 명확히 구별 짓기는 쉽지 않다.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때와 장소에 따라 관행처럼 시청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이 뉴스 혹은 영화라고 습관적으로 판단할 뿐이다. 어느 쪽이 더 객관적이지도 않고, 어느 쪽이 더 낭만적이지도 않다. 감독들은 아이디어를 뉴스 매체에 의존하기도 하고, 기자들은 영화를 보면서 머릿속에 담아두었던 그림들을 사건에 투사하기도 한다. 뉴스를 보거나 읽다 보면 기자의 내레이션이나 카메라의 구도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형태를 취하며 우리의 시야를 짓누른다. 간혹 뉴스를 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저 기사를 영화나 소설로 만들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어김없이 보도되고 있는 화면 속의 그 사건-사실의 저편에 있는 더 커다란 어떤 서사나 음모가 화면 밖으로 펼쳐진다. 전말을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느낄 때만큼 의욕적일 때도 없다. 뭔가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고 싶어지거나, 열정적인 에세이를 쓰고 싶어지거나, 그것도 아니면 당장에 친구를 불러 술잔이라도 들고 싶어질 때처럼, 우리는 뭔가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쉽게 흥분한다. 그러나 실은 아무것도 모른다면 어떠할 것인가?

지금  내 앞에는 사진 몇 장이 놓여 있다. 최근 뉴스에 보도된 "더블드래곤" 파업 사태를 다루는 인터넷 동영상 기사를, 서버에서 지워지기 전에 컴퓨터 스크린 샷으로 찍어 놓은 것이다. 동영상에서는 카메라가 공중을 활공하며 건물 옥상을 내려다본다. 옥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요를 따라다니며, 기자는 마치 축구나 마라톤을 생중계 하듯이, 더 정확히는 영화의 내레이터처럼 벌어지고 있는 진상을 조목 조목 되풀이 한다. 컨테이너가 시위자들이 있는 쪽으로 접근했다느니, 쇠파이프로 경찰 한 명을 잡고 마구 내려친다느니, 검은 연기가 옥상 저편에서 솟아난다느니, 폭발물의 폭음이 터지기 시작한다느니, 도망가는 무리를 경찰이 뒤쫓고 있다느니, 이 편 옥상에선 도망가는 무리에 대고 체류탄을 쏘아댄다느니, . . . TV를 보는 우리들은 그 소요와는 무관한 회색천사(흰색과 구분이 거의 안 되는) 마냥 저 연기가 나는 옥상 위의 불행을 멀리 공중에서 바라보며 혀를 찬다. 혀를 차는 순간 쫓고 쫓기는 양자 모두다 무가치하고 편협한 당사자들임이 조용히 선언되고 만다.

 

그러는 와중에 저 영상물에는 무엇인가가, 결정적인 무엇인가가 빠져있는 것이 아닐까 혹은 과도한 무엇인가가 덧붙여진 것이 아닐까 라는 강한 의구심이 떠나지 않는다. 그 의구심을 증명할 수 없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할 수 없을 때, 혹은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어떤 묘한 분위기가 주변을 사로잡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육체들의 환각과도 같은 소요들 사이에 웅크리고 있는 혹은 그 변두리의 대기 전체에 엷은 어떤 것이 퍼져있을 때, 우리는 막연하고도 무책임한 뉴스 다큐멘터리 영상에서 빠져 나와 소설을 쓰거나 영화를 찍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기업의 노동자도 아닌, 경영인도 아닌, 주주는 더더욱 아닌 내가 저러한 유형의 뉴스를 접할 때, 저 위에서 뛰어다니거나 마음을 졸이며 TV를 바라보는 이들과는 전혀 다른 상상을 하게 되는데, 가령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SF 전쟁물 혹은 과학기술과 그 영향이라는 주제 하에 괴기물 유사한 영상이 떠오르는 것이다. 기업의 구조조정이나 노동자들의 파업이 SF와 가지는 밀접한 관계는 근거가 없는 얘기가 아니다. 때로는 사회학과 경제학의 담론보다도 더 치열하고 구체적인 재현의 역사가 SF에는 있다. 뤼미에르 형제의 『도살기계(Charcuterie Me'chanique)』(1895) 이후, 한동안 SF의 역사는 그 아류들에 의해 돼지와 개의 수난과 희생을 등에 업은 소시지 가공의 역사(개에서 소시지로, 소시지에서 개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기계와 공장 생산체제 그리고 생명(동물과 인간)의 해소될 수 없는 투쟁의 역사가 있다. 많은 SF의 아류문학 혹은 영화들이 있지만, 기계권의 출발 자체가 가지는 역사적 조건을 생각해 본다면, 결국 SF의 정수는 사이언스의 주체인 자본의 꿈과 소외된 노동(삶)의 전쟁이라는 오래된 마르크스주의의 테제들 안에 고스란히 안착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포스트모던 시대에 이는 로봇공학과 우주프로젝트에 의해 범우주적 숭고미학으로 팽창하여 sugarcoating 되고 있다. 그리고 점점 짙어지는 그 그늘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지각에서 점점 희박해진다.

마르크스주의 미디어 논자들 중 상당수가 형식주의를 비판했던 골자는, 그것이 항상 카메라를 든 사람을 무기명으로 처리하고 만다는 것이었다. 거기서 모든 시선은 비존재적 추상이 될 운명을 피할 수 없다. 누가 바라보는가? 카메라를 든 자는 어디에 있는가? 시선의 무기명 속에서 우리는 이미 카메라의 눈 자체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TV와 라디오 혹은 인터넷 매체의 동영상이나 이미지들을 바라보면서, 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질문 하나를 잊은 채 우리는 미디어에 뛰어든다. 공중을 활공하며 소요를 바라보고 있는, 천사와도 같은 저 눈은 결코 화면상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마치 우주 밖에서 포착한 위성사진의 미학과 테크놀러지의 결합된 이미지를 바라보며 신기하게도 내가 그곳의 한 지역에 틀림없이 위치하고 있다고 기하학적 확신을 하듯이, 저 화면에서 쏘고 있는 X선 입자들이 우리의 망막과 신경세포들을 반복해서 두드리는 동안, 최면효과와도 같은 총체성의 눈으로 자기를 바라볼 때 만큼이나 우리 자신을 알고 있는 것 같은 희열과 확신에 찬 자기상호적 Cogito. 현대 미디어의 특징은 담론적 상호성(discursive reciprocity)의 부재 혹은 그것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의 말이고, 누구의 시선인지, 담론의 어떤 주체이고 어떤 위치에서, 무엇을 감추려는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주체든 객체든 미디어 환경 하에서의 추상화. 시-감각이 지배하는 포스트모던 기업문화가 발산하고 있는 모호성의 정치학. 그로 인해 미디어와 그 눈을 우리로부터 육탈시키고 그것과 대면하는 어떤 구도를 만들어낼 것, 결국 미디어의 무의식적 주체가 무엇인지를 기를 쓰고 찾아 나서야만 한다.

더블드래곤 사건에서 특이한 것은 기업 혹은 회사가 완전하게 추상적 무형성을 띤 채 우리 앞에 드러났다는 점이다. 틀림없이 뭔가가 벌어지고 있었고, 어떤 가시적인 움직임들이 거기에 있었지만, 그래서 우리는 그 점에 대해 언론 미디어에서 혹은 우리들 서로간에 그 사실에 대해 말을 한다. 실제로 움직임들의 실행자들(주체가 아닌)은 화염병을 들었건, 펜을 들었건, 체류탄 총을 들었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대기 전체에 퍼진 회사의 잠재적 파도에 파묻혀 그것을 위해 싸우고 또 돌진한다. 이상하고도 특이한, 역설처럼 보이지만 실은 너무나도 분명하고 단순한 뜻을 가진 "파산을 통한 회생!"이라는 용어가 주는 압도적인 위협 아래. 문제는 저들이 들락거리며 오르락내리락 해가며, 장악하고 빼앗기고, 육체들을 밀어붙이는 공간으로서, 버려진 농지 아니면 공터인 허허벌판에 건설된 저 공장 건물들이 아니라, 숨을 쉬고 있는 동안에도 연기와 체류 살포액보다도 더 짙은 농도의 선언 혹은 확신을 형성하는 음모이다. 저 용어가 주는 압도적인 위력은, 그것이 "완전하고도 합법적인 해고"를 의미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확신하고 있었던 어떤 것, 다시 말해 그들을 존재하게 하고 그들에게 무모함의 용기를 주었던 프롤레타리아적 Cogito가 자신들이 생각했던 그것이 결코 아니었으며, 이제 완전히 종말을 고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한 것에 있다.

"파산을 통한 회생"에는 기업 주체(누구지?)의 관점에서 바라 본 두 가지의 교묘하고도 비가시적인 제스처와 전략의 결합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는 파업이 불러올 필연적인 결과를 단호하게 선언하고 그 당사자에게 책임을 '항변'하는 듯한 효과와 아울러 추후의 사태에 대한 경고의 전략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파괴적 결과를 어떤 식으로든 수습하여 정상적인 상태로 복원해야만 한다는 기업 주체의 도의적 의지를 반영하는 것 같은 제스처를 취함으로써 기업의 사회적 기능과 책임과 사명을 실천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대견스럽게 묘사하면서, 비난 받고 책임을 져야 할 우울한 재앙의 뒤에서 무엇보다도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그것이 회생의 한 형식으로 수용되어 미국(GM의 경우)에서 이미 검증된 것으로, 기업이 본질적으로 무엇에 기반하고 있는 것인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만, 위에서 말한 그 묘사가 미디어에 의해 각색되면서 공장이 세워진 평택 지역에 대한 도덕적 공동체적 책임을 떠맡은 기업의 회생이 곧 주민과 공동체 전체의 회생으로 좋은게 좋은거지 식으로 sugarcoating되어 그 본질적 기반에 연막이 뿌려지는 와중에, '파산을 통한 회생'? 그것이 무슨 말인가? 파산신청을 하고 회사의 문을 닫고 일하는 사람들을 해고하면서 도대체 무엇을 회생시킨다는 말인가? 보존되고 살아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라며 까칠하게 찬물을 끼얹으며 궁극적인 질문을 집요하게 던지기도 전에, 내러티브의 반전으로 질문의 요지를 중화하듯이, 과감한 법적 최종결정의 제스처로 그 연막의 뒤에서 약간의 '장치변환' 혹은 '기호들의 변환'(가령, 소유주 혹은 법인을 바꾸는 절차)을 통해 보존과 회생을 도모한다는 명목으로 가벼운 문서 뭉치를 손에 들고 드디어 사무실로 돌진하며 그 실체가 등장하는 바로 그 채권 소유주들의 실질적인 경제활동으로서의 치고 빠지는 전략이 그것이다. 기업이 파산을 해야 한다는 선고를 그 스스로 내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변증법적 양날치기처럼 뭔가를 보존하고 들어올려야 한다는 회생의 원칙을 고수한다는 미사여구로, 파산과 회생의 각각의 책임소재가 원래의 자리에 속한 것으로부터 빠져 나오거나 식별이 불가능해지는 가운데 적절치 않은 당사자들에게 배분되고 있는 것이다: 파산은 파업 주동자들에게, 회생은 기업주체 경영인과 그 소유주들에게.

이 분배는 미디어의 SF분위기 화면 속에서 우리가 흔하게 보아오던 어떤 심리적 구도를 형성한다. 한편에는 약자를 환기하는 희멀건한 피부색에 금테안경을 쓴 착하고 선량한 기업 상인의 이미지가 노동자보다도 더 힘들게 땀을 흘리며 살아가는 상인의 긍정적 실용도덕주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고, 다른 한편에는 작업장 옥상에 올라가 돈을 더 달라고 생 떼를 쓰며 위협과 폭력을 일삼는 빨간 마후라를 두른 영업 훼방꾼들의 저속한 이미지가 건달의 내러티브 비스무리한 상투적인 미디어 구도에 의해 화면 속에서 끊임없이 우리의 주관적 회로를 고착시킨다. 미디어가 주는 메시지는 파업이란 여전히 어떤 훼방, 철없음, 이기심,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철회될 수 밖에 없는 쥐불놀이 혹은 할로윈처럼 맹목적 연례 이벤트의 이미지일 뿐이라는 점이다. 회생을 염원하는 반복적인 코멘트("과연 더블드래곤이 회생될 수 있을까요?") 속에는 이미 참담한 심정으로 쏟아내는 초과 데시벨의 어떤 비난과 질책이 있다. 한 가지 문제는 폭도들의 출처가 분명치 않은 외부인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회사의 파산을 주도하고 그 법적 소유관계를 기입한 문건을 쥔 기업주체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파산의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이며, 청산에서 남은 잔여 자산의 분배 혹은 변제절차의 몫에서조차 우선순위에서 배제될 것이다. 실상 '파산을 통한 회생'의 의미와 가치 역시 이 우선순위에 비례하여 그 양이 달라지는 용어일 뿐이다. 그렇다면 회생의 주역은 누구란 말인가? 그리고 지붕 위의 저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어디에서 무슨 이유로 날라와 옥상에 뚝 떨어진 숙주들일까? 아무리 하늘 위에서 천사의 총체적 시선으로 바라보아도 숙주들의 전쟁만 보일 뿐, 파산의 주체이자 회생의 주체, 즉 Alien이 숙주들의 배양과 파괴를 통해 보존하고 싶어했던 바로 그 순수생명은 어디에 있는가?

개인에게 있어 돈이란 사물(성)을 추상화하는 가장 보편적 형식이다. 행복이든 사랑이든 삶의 활력이든 이러한 추상적 가치들은 사물 그 자체로부터는 발생하지 않는다. 물질과 사물에 둘러싸인 우리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들로부터 추상적 보편성을 끄집어내야 할 것이고, 그럴 능력이 없다면, 사물 그 자체를 하나의 추상적 가치로 만들 필요가 있다.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사용할 수도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보편적 실재인 냥, 우리는 사랑과 행복과 능력을 무한하게 약속해줄 것처럼 보이지만 매번 우리를 빠져나가는 보편적 대리물로서의 화폐를 욕망한다. 화폐에의 욕망이란 사물의 무한한 되돌아옴을 보증해주는, 고갈되지 않는 사물의 샘을 소유하는 길이다. 물건이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추상적 가치 자체라고도 할 수 없는 돈은 그런 식으로 의심되지 않는 가치로서 우리의 무의식이 되는 것이다. 파산을 통한 회생에서 우리가 목격한 것이 바로 기업과 기업주체 그리고 우리의 이러한 추상적 관계이다. 회사는 터전이나 특정한 형태의 삶의 장소가 아니라, 자본과 이윤의 이름으로 모든 사물적 관계를 무한히 가능하게 해주고 지역사회 전체를 구원해 줄 것처럼 약속을 해주며, 여기저기로 숙주들을 찾아 떠도는 이해 당사자들의 보편적 화폐이며 순수생명을 닮았다. 이를 온전히 보존하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성공적인 경제와 성공적인 (생명)윤리의 달성에 버금가고("과연 더블드래곤이 회생될 수 있을까요?"), 그 추상적 교환의 실천 속에서 왔다 갔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어느새 합법적 해고든 경제-합리적 구조조정이든 자장가처럼 파도처럼 진통의 효과를 내며 법인의 이름으로 중화되기에 이른다.

공장에서 돌아가는 컨베이어벨트와 그 앞에 죽 늘어선 숙주들의 그림과 유사하게도 사회 전체의 컨베이어벨트와 그 사이사이에서 부대끼는 숙주들의 그림이 있다. 숙주들은 작업장이든 가정이든 지역사회든 아니면 무슨 무슨 청사든 할당된 공간에 붙박여 있고, 이들 안에서 생명을 키워 살아가는 세계령은 바람처럼 은유처럼 떠돌아다니며 정치적 법적 문화적 숙주들을 찾아 선회를 하는 가운데, 그를 불러들이기 위해 실행의 대리인들 그리고 주술인(株術人)들은 서로 간에 인수, 매각, 합병의 무가치하고도 야만적인 피의 강신제를 치른다. 지방(紙榜)을 대체함으로써 새로운 신주와 제주가 들어서면 이 변태적인 형태변이 속에서 지붕 위의 숙주들은, 매 순간 요철을 바꾸어가며 접속단자를 선회하여 종잡을 수 없는 감기 바이러스와 전쟁을 벌이듯이, 실은 세계령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지되는 적은 언제나 그 대리숙주들 뿐이다. 지각할 수는 없지만 가공할 만한 대기전체의 괴물적 기운이 옥상에서 버티고 있는 배제숙주들에게 으르렁거리며 달려든다. 그 기운을 등에 업고 하이테크 살상 장비들을 장착한 전경과 여타 터프가이 스타일 유니폼의 전사들이 크레인에 매달린 컨테이너를 참호 삼아 화염방사기 모드(제작자 혹은 주문자의 욕망을 반영하는)의 물 대포와 가스를 직격으로 쏘아대고, 제대한지 이십 년도 넘은 중년의 배제숙주들은 그들에 맞서 깡마른 다리로 휘청거리며 돌진과 후퇴를 반복한다. 이 양자진영의 숙주들을 둘러싼 대기에는 타오르는 연기보다도 홀가분하게 여기저기에 공통으로 퍼지는 세계령의 열기가 이들을 압도한다. 물론 대리숙주 뿐만 아니라 실행의 주체숙주들이 있다. 그러나 모두가 나름대로 업주이자 상인이므로 누가 더 주체이고 누가 더 객체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워졌으며, 완전히 뒤섞여 한 몸에 머리가 둘 이상인 더블드래곤의 이미지로 서로를 잠식하고 서로를 태우고 있는 것이다.

일면 SF는 자본의 꿈 내용으로 보인다. 가령 로봇공학의 후원자이자 수혜자는 자본일 뿐만 아니라, 요제프(Joseph Čapek)이든 카렐(Karel Čapek)이든 차펙 형제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다름 아닌 노동 소외였던 것이다. 아시모프(Isaac Asimov)는 1941년 자신이 정식화한 로봇공학의 원칙(인류를 위한! 인류에 의한! 인류의!)을 도구를 정당화 하는 원칙으로 확대시켰는데, 도구에 관한 이 원칙은 자본의 노동에 대한 무의식적 시선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도구는 위험하지 않아야 한다! 도구는 효율적 기능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도구는 망가져서는(friction) 안 된다! 그러나 위험하거나 비효율적이거나 망가진다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 바로 여기에 더블드래곤 사태가 가지는 어떤 한계점, 즉 우리가 다소 구질구질하게 우정 어린 미련을 두고 티격태격 하기도 했던 주제, 인간과 노동 그리고 인간과 자본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오래된 이상적 연관성의 한계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왜냐하면 한 쪽에서는 문서를 쥔 희멀건한 범생 스타일의 블레이드러너가 은행 문을 박차고 나와 장부기록 제거를 위해 법원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반면, 다른 한 쪽에서는 무장한 터미네이터가 물리적 제거를 위해 헬리콥터와 컨테이너의 줄타기 활극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차없이 완전하게 제거되는 비참 속에서 마후라를 둘러 얼굴을 가려가며 여전히 자신의 미디어 정체성을 의식하던 배제숙주들은 그 자신의 사회적 본질이 단숨에 드러나는 순간을 목도하게 된다. 도구의 명시적 폐지 그리고 물리적 제거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는 순간 벨트시스템을 전환하여 새로운 장착과 생산라인 배열과 같은 트랜스포머식 형태 기능 전환과는 수준이 완전히 다른 방식의 완전제거.  이때 법은 세계령의 가장 막강한 전사가 된다. 왜냐하면 제거가 더 이상 약육강식의 야만이나 약자에 대한 강자의 억지와 폭력이라고 하는 외부적 사안이 아니라 '합의'라고 하는 계약상의 절차로서 우리가 이미 참여하여 서명한 가운데 도출된 결과들을 묵인하도록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법의 이름으로 실행되는 내적 정당화이기 때문이다.

 

미디어의 화면 속에서 파업은 이제 네트워크로 연결된 기업망과 기업을 위시한 지역 경제망 그리고 기업의 제품을 사용하는 소비자, 그 모두의 심리적 피해와 금융계좌상의 경제적 손실로 완벽하게 공식화되어 버렸다. 이제 비로소 SF가 리얼리즘(어떤 리얼리즘인지는 아직 우리가 결정하기 어려운)의 테마가 되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음모는 더 이상 환타지의 주제가 아니라 삶 자체의 현실화 기제임을, 그리하여 그 양자 중 누가 모델이고 누가 모방인지를 구분할 수 없는 실상이 펼쳐지고 있음을 우리가 조금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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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매체는 두 방향의 형식적인 운동을 통해 작동한다. 우선, 그것은 연장(延長)의 속성을 갖는 덩어리를 절단한다. 기계 테크놀러지를 보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매체의 절단 기능은 외면적 방식으로 수행된다. 예로, 자동화된 기계는 사물의 본성과는 관계없는 방향을 따라 대상을 절취한다. 모든 사물은 그 자신의 고유한 결을 잃어버리고, 절단의 외면적 운동과 그 힘의 규격에 의해 재단되는 것이다. 나무는 이제 더 이상 갈라지지 않고 잘릴 뿐이다. 이런 식으로 현대적 공간은 기하학을 재현하고 있다. 휴머니즘의 현대적 표현은 바로 이 힘에 대한 역기능으로 일관되어 왔다. 둘째로, 매체는 절단된 것들을 다시 연결하여 일련의 연쇄를 만들어낸다. 이로써 하나의 자동화의 메커니즘이 출현하는데, 무엇보다도 이 자동화는 자연적 인과성을 결여한 상태이다. 왜냐하면 메커니즘의 요소들은 이미 외면적인 방식으로 절단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연된 관계를 갖는 잘려진 것들이 특정한 연속을 띠기 위해서는 이들의 간극이 얼마나 최소화되는가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기술 매체의 관건은 거리와 간극의 최소화에 달려 있는 것이다. 시간은 이제 속도로 대체되고 공간은 이를 압축이라는 형식으로 표상한다. 베르그송 식으로 말하자면 시간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조차도 지속으로부터 분리되어 공간화 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현대의 미적 표현에 있어 선(線) 특히 직선은 하나의 미덕이 되었다. 현대의 기술매체는 사물의 유기적 연장을 불연속의 연쇄로 치환하고, 이 외삽으로부터 생기는 간극과 균열은 속도의 최대화에 의해 봉합된다. 물질을 생산하는 수단으로서의 생산기계의 자동화는 배치와 순차를 통해 가장 효율적인 공간의 활용, 즉 속도의 최대화를 어떻게 창출할 것인가에 집중한다. 나아가 대중 매체나 컴퓨터와 같은 전자매체가 활용되면서 이 간극은 제로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다시 말해 공간으로부터 시간성이 완전히 제거됨으로써, 세계는 이제 선분이 아닌 하나의 점의 상태가 된다.

매체는 사물과 현상들의 불연속적 연쇄를 만들 뿐 아니라, 이에 대한 우리의 지각패턴을 동시적인 것으로 만든다. 예를 들어 우선 그것은 감각능력들의 종합적 활용을 요구한다(멀티 미디어를 보라). 나아가 그것은 공간적 거리를 종합함으로써, 이 거리에 상응하는 신체 경험의 간극을 현재적 상태로 만든다. 여기서 공간지각은 매체의 속력의 증감에 의존한다(승강기나 자동차를 보라). 또한 매체는 시간적 차이 역시 무한한 현재 속으로 체포해 버린다.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순간이며, 우리의 지각에 포착된 모든 사물들은 일종의 에테르의 상태가 된다. 그런데 사물의 연쇄과정에서 이렇게 시간의 물질적 두께가 제거되고 나면, 다시 말해 지각의 동시성이 발생하여 물질의 운동에 상응하는 지각의 한계를 넘어서게 되면, 자연적 인과성이 절연되어 요소들 각각 자신 안에 어떠한 것도 내포하거나 지시하지 않았던 연쇄 메커니즘은 또 다른 본성을 갖게 된다. 단순한 시간상의 연쇄가 이제는 인과성을 갖는 새로운 내용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맥루한의 다음과 같은 설명을 보자: "가장 위대한 반전이 전자성(electricity)과 함께 나타난다. 이것은 사물들을 순간적인 것으로 만들면서 연쇄를 없앤다. 그리고 이제 순간적인 속도로 인해, 마치 연쇄나 조작과는 아무 관련이 없던 것처럼, 사물들의 원인이 인식되기 시작하는 것이다"(McLuhan 12). 하나의 관점이 어떻게 생겨나는가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맥루한이 언급한 영화매체나 큐비즘도 역시 분절과 연속의 메카니즘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나아가 이것은 특정한 형식의 인식활동을 만들어낸다. 큐비즘의 발생 시기와 근사(近似)한 영화매체는 분할된 컷들의 단순한 기계주의를 넘어 일종의 구조적 환각을 생산하는 장치가 된다.

기술 매체의 운동이 연결이나 이동인 것만큼이나 그 심층에는 절단과 절연이 있으며, 그들간의 재 연결에는 그에 상응하는 사유활동이 있다. 그런데 자르고 봉합하는 종합형식이 동시성을 띠면서, 매체는 세계를 표면적이고 추상적인 운동으로 치환해 버린다. 이러한 매체의 급진적인 변화는 경험 능력들을 신체로부터 박탈하여 그 자신이 대리자가 된다. 매체는 일종의 신체가 되는 것이다. 매체가 인간의 감각능력을 비롯하여 신체일반의 확장인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가상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물질성을 벗어버리고, 과거였다면 반드시 자연적 조건들과 결합함으로써만 현존할 수 있었을 실재성을 그 자체 순수회로로 변형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더 이상 물질의 방해를 받지 않고 효과의 실재만으로도 얼마든지 우리 자신을 연장하고 확장시킬 수가 있게 된다.

맥루한의 관심은 바로 이 매체가 갖는 통합체적인 특성에 있었다. 모든 계열을 합목적성을 띤 사이버네틱 회로망으로 단일화하고 나아가 스스로 실체가 되는 힘. 그는 이 힘이 질료적 경험을 축소하고 추상적 견해와 반응만을 유발한다는 점을 지적한다(주1). 그는 매체가 모든 부분들을 종합하는 원리를 허위적 연결이라고 보았다. 그것이 허위적인 이유는 인식의 실질적 조건인 감각과 지각을 불균형적인 상태로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차적인 문제는 매체에 의해 형성되는 사회적 관념이나 동의보다는, 매체가 이미 갖춘 추상적 운동에 의해 동질화되는 감각과 지각의 패턴들이다. 감각에서 사유로의 이동이 아니라, 동질적인 추상관념으로부터 감각으로의 이동으로 순서가 역전된다: "기술의 효과는 여론이나 개념의 수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서서히 우리의 감각이나 지각패턴을 바꾸어 놓는다. 진지한 예술가만이 오로지 형벌을 받지 않고 무사히 기술과 대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감각의 변화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McLuhan 19).

단일한 회로로 동화된 신체로부터 우리 자신은 자연스럽게 행위나 관념 뿐 아니라 삶 자체를 단일성과 전체성의 효과 아래로 집결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매체는 이미 그 자체 하나의 신호이며 메시지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반응하고 행위하고 사유하도록 강요하거나 권고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 자신의 반응이며 행위이며 사유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매체는 이미 우리 자신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좋거나 나쁘지도 않은"(11) 것으로서 사용이나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좋거나 나쁜 것으로서 우리 자신의 윤리를 결정하는 존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이다.

(1)
"토인비는 영매화(etherialization)라는 개념을 통해 매체의 변형적 힘을 논하는데, 이것은 그가 보기에는 모든 조직이나 기술에서 진보적 단일화와 능률의 원리이다. 대체로 그는 이 형식들이 우리의 감각적 반응들에 적합하지 않게 되는 효과를 무시하고 있다. 그는 한 사회에서 매체와 기술의 효과와 관계하는 것은 우리의 관념적 반응이며, 인쇄기술의 결과는 우리의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문자성이 발달하고 동질화된 사회 속의 인간은 다양한 것과 불연속적인 삶의 형식들에 민감해지지 않으며 감각적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3차원의 망상을 통해 자신의 나르시스적 고착의 일부로서 '비밀스런 관점'을 갖게되고, 블레이크나 다윗왕이 간파했던 "우리가 보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이 된다"는 경구와는 담을 쌓는다".(McLuhan 20)

인용문헌
McLuhan, Marshall. Understanding Media: The Extension of Man. New York: McGraw-Hill,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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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매체는 지구 전체를 나아가 우주 전체를 하나의 촌락으로 만들어 버렸다. 신문을 읽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우리는 그 촌락의 일원임을 분명히 자각하게 된다. 헤겔이 말했듯이 현대인은 아침저녁으로 신문을 읽으면서 중세 사람들에 버금가는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중세의 교회가 서구 전체를 하나의 가족으로 끌어 들였듯이, 현대의 신문과 텔레비전은 인류 전체를 하나의 마을로 포섭한다. 대중 매체는 서로 실질적인 관계가 없는 부분이나 개인들을 하나의 전체로, 다시 말해 추상적 관계로부터 파생하는 공동체 의식을 조직한다. 일종의 전도된 공동체라고나 할까? 그리하여 대중 매체에는 묘한 역설이 있는데, 알지도 못하면서 잘 아는 세계, 체험하지도 않았음에도 익숙한 세계의 충만함이 있다는 점이다. 신의 전능한 품속에서 내가 태어났듯이, 나의 존재는 충만한 전체에 속해 있다. 그러나 내가 속한 전능하신 아버지를 한번도 보지 못했듯이, 나의 충만한 전체 역시 그 처소를 알 길이 없다. 감각의 세계로부터 추상의 세계로의 전환. 매체가 만들어 놓은 공동체는 실재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 양태가 전혀 다른 실재이다. . . .


<문예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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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침묵

monograph_column 2006/08/08 16:49

여담 한 마디 하겠다. 나는 최근에 말수가 적어졌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꽤 오래 전부터 그렇게 된 것 같다. 특별히 누군가를 만나서 수다를 떠는 경우가 적어졌고, 혼자 살다보니 일주일에 며칠씩이나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보내는 날이 많아져, 자연스럽게 말이 없어진 것이다. 이제는 조리 있게 설명하거나 상대의 말에 재치 있게 응수하는 테크닉조차 다 사라지고 없다. 말이란 습관이 아닌가? 심지어는 사람들을 만나서 잡담을 하는 일이 점점 고역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내 직업상 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하지만, 그것은 말하기가 아니라 오히려 글쓰기가 아닌가 싶다. 우선 충분한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마음속에서나마 정리하고, 이런 저런 상상을 감미료로 채색하여 준비하는 것이다. 교재가 있으니 할말이 없으면 그것을 읽기만 하면 된다. 그러다 보니 강의 시간에는 학생들을 쳐다보지 않게 되었다. 준비된 것만 잘 기억하여 낭독하고, 마지막에 가서 그들의 수긍하는 고개 짓만 확인하면 만사형통이기 때문이다. 강의란 결코 대화일 수가 없는 것이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나는 몇 년 동안을 말 한 마디 없이 수월하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말수가 적어진 것은 내 주변의 불가피한 조건들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거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우리는 지하철이나 대합실과 같은 공공 장소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대면하고 부딪치지만, 결코 한번도 그들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 아무 곳에서나 군중들의 사진을 찍고, 그 사진 속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관찰해 보라. 제각각의 낯선 눈빛들에 놀랄 것이다. 자신만의 방으로 향하는 그 시선들은 마치 거리에서 혹은 다리 위를 걷고 있는 뭉크(Edvard Munch)의 초상들을 보는 듯하다. 개인들은 바로 그 낮선 시선을 통해 다가올 미래의 관계에 대한 이름 모를 불안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날 좀 내버려둬!"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현대인들의 소외는 고립이나 고독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가져올 상상된 결과에 대한 두려움에 있다. 뭉크가 고독을 절망과 관계짓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의 정신적 소외는 고독이 아니라 오히려 수다가 예증하고 있다. 말을 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말이 이어지지 않으면 죽음 뿐!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침묵이며, 그래서 말이 중단된다면 절대적인 무(無)의 상태에 직면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에 사로잡힌다. 그러니 우리의 수다는 견딜 수 없는 고독에 대한 가련한 자기변론이 되거나, 나아가 더 심해진다면 환상적 도피 같은 것이 되기 십상이다. 정신적 소외란 고립이나 고독이 아니라 그에 대한 공포, 즉 자기 자신에 직면하기를 두려워하는 일종의 돌림병이다. 그래서 때로 사람들은 이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마치 수건을 돌리듯이 자신의 공포를 한없이 돌려가면서 타인에게 투사하고, 그로부터 일종의 공범의식 같은 것을 만들어낸다. 절대적 무에 직면하지 않도록, "나뿐만이 아니라 바로 당신도 노력을 해야할 것 아니오!"라고. 말이 없는 사람을 보면 왠지 모를 불쾌함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침묵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말을 강요하는 관계가 된다. 친구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왜 아무 말도 없어? 얘기 좀 해봐!" 만일 이 대사가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어떤 부부의 것이었다면, 그들만큼 불행한 관계가 또 있을까? 그 대사가 암시하는 대화의 부재 때문에 불행하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의 불행은 그 대사 자체, 저 수다에 있다는 말이다. 저토록 수다스러운 배우자가 있다면, 당신은 이미 저주받은 인간이다. 사람들이 도서관만큼이나 조용한 출근 만원 지하철을 문제삼지 않는 것은, 그 질식할 것 같은 침묵 속에서나마 저러한 수다를 듣지 않아도 괜찮다는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의 제도처럼 애초부터 거세되어버린 관계를 축복처럼 묵인하고 있는 그들의 태연한 침묵을 보라. 그러나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진공 상태의 지하철 속에서 태연한 죽음으로 보낼 수는 없다. 그래서 서로 아무 말이 없는 동안에도 우리는 자주 저와 같은 수다를 듣게된다. 침묵 속의 수다를 느끼는 관계를 우리는 불편한 사이라고 말하곤 한다. 수다쟁이들을 간혹 보게되는데, 내가 보기에 그들은 말을 못하게 하는 억압에 대한 단순한 저항이 아니라, 오히려 입을 막는 소극적 억압보다 더 억압적인 요구, 즉 말하게 하는 강요를 통해 억압을 적극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기제이다. 억압적 고문은 말을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강요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히스테리를 넘어 새디즘적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 위해 오랜 시간동안 앉아서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그가 하는 모든 말에 흥미를 느끼기 때문에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제대로 된 흥미로운 토론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똑같이 반복되는 이야기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화두들, 이것이든 저것이든 언제든지 교정이 가능한 사실들, 모종의 의도 하에 뒷 냄새를 풍기는 사족(蛇足)들, 다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궁금하지 않은 정보들. . . . 정치가들의 수다야 지적할 가치도 없고,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나오는 뉴스 기자들의 수다를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역겨움 같은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심지어는 모든 방송국의 뉴스가 한결같이 내보내는 똑같은 대사와 똑같은 각도의 카메라를 보고 있으면 겁이 나기까지 한다. 저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수다가 강요인 이유는 다름 아닌 그 상투성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억압은(그래서 심지어 악이 되는) 바로 그 진부하고도 상투적인 말들이 아닐까? 2차 대전 이후 지금까지 미국이라는 나라가 인류의 적(혹은 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가공할 만한 그들의 침략 때문이 아니라 맥빠지게 하는 그 진부함과 상투성에 있다. 그들은 예측된 감동을 제조하는 경이로운 능력이 있다. 우리는 그들의 침략전쟁에 반대 할 것이 아니라, 그 보다 더 최선을 다하여, 헐리웃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여인들의 하이힐이 걸쳐진 다리, 키스할 때면 여지없이 올라가는 그 왼쪽 종아리를 잘라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사드의 소설이 독자들에게 고문을 맛보게 해주는 요소는 다양하게 묘사된 새디스트의 외설과 고문들 때문이 아니라, 상투적이고도 진부한 논증이 끊임없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반복이야 처절한 의도를 품고 자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술적이라고 말하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상투성이란 물론 대중매체에 의해 실천된 것이긴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대담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왜소한 부르주아의 산물이다. 자본가들은 결코 도박을 모른다. 시장판에서 살고 있는 개인들은 이를 잘 내면화한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이 상투성에서 나오는 지루함을 피하기 위해 술을 마시고 수다를 떨거나, 많은 사람들이 들떠있는 장소에 나가 춤이라도 한 판 추고 싶어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것은 기름을 안고 불 속에 뛰어드는 것보다도 더 위험한 짓이다. 그것은 오히려 부르주아가 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거두절미하고, 차라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끊임없이 침묵을 메우려는 두려움에 찬 불필요한 화두들이 아니라, 정말로 값진 화두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자리, 바로 침묵의 자리가 아닐까? 흥미롭고도 중요한(이 둘은 상호 보완적이다) 말이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고독! 아무 할 말이 없어도 두렵지 않은 정다움! 말하지 않아도 전혀 심리적 처벌이 가해지지 않는 조용한 신뢰! 흥미로운 대화 뿐 아니라, 진정으로 값진 것이 창조되려면 바로 저와 같은 조건들이 마련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Posted by huun

프레드릭 제이미슨(Frederic Jameson)이라는 미국의 한 문화 평론가는 글을 별로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이다. 아는 건 많은 사람인데, 그다지 세련되지 못한 스타일에다가, 잡다한 지식들을 뒤섞어가면서, 자신만이 알고 있는 용어라든가 개념들을 남발하는 부류이다. 싸르트르의 제자였다는데, . . . 그는 철학, 미학, 문학, 영화, 심지어는 건축, . . . 안 건드리는 분야가 없다. 영화에 대한 관심도 그냥 관심이 아니라,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암시장에서나 구할 수 있는 어디 저 제3세계 작품들을 가져다 놓고 분석이랍시고, 궁시렁 궁시렁 댄다. 아마도 마르크스주의자들 중에서 가장 털털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노력은 많이 하지만, 끼는 부족한 사람이랄까? 하지만, 가만히 읽다 보면, 간혹 광인이 해대는 횡설수설 속에서, 섬광처럼 출현했다가 금새 사라져 버리고 마는, 어떤 빛과도 같은 통찰을 접하게 된다.


소비 자본주의의 문화생산은 상품(과 그 교환)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문화를 제공할 테니, 돈을 달라!"), 우리들은 그 문화적 내용 보다는, 무의식적이고도 집단적인 형식의 소비와 구매를 실천함으로써(구매란 결코 개인의 취향의 전개과정이 아니다), 그 상품의 형식을 실현하고 있다. 좌측이든 우측이든, 상류이든 하류이든, 그와 같은 교환의 일상적 실천 속에서, 우리는 사회에 범재하고 있는 신과도 같은 어떤 것에 대해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개인들의 집단적 소비실천은 마치 슈퍼에서의 구매행위가 사회 참여의 한 형태인 양 알레고리화되어, 무의식적인 환상을 통해, 추상적 총체성(totality)의 관념으로 나아가는 것이다(가령, "구매자는 소비주체이고, 소비공동체의 일원이며, 경제의 주체이다!"라는 식의). 그리고 미디어는 이 총체성을 사실적으로 입증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어떤 편안한 귀속감과 아울러 그에 동반되는 알길없는 어떤 허기를 느끼게 한다(그래서인지, 가령, 텔레비젼과 스낵의 밀착 관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


이러한 논의는 넓게는 맥루한(Marshall McLuhan)의 미디어 이론("미디어는 국가이고 세계이다"), 좁게는 앤더슨(Benedict Anderson)의 민족 공동체(상상으로 만들어진 경험의 총체) 논의에까지 연관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제이미슨은 이와 같은 총체성의 관념을 획책하는 모든 담론과 실천과 이데올로기를 '음모(conspiracy)'라는 용어로 처리하고 있다. 그리하여 음모에 관한 영화(첩보 영화, 정치 스릴러, 범죄 스릴러 등)들을 바로 이 자본주의적 소비와 마케팅, 그리고 그 시스템이 만들어 놓은 총체적 공간, 충만하면서도 텅 빈 공간 속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 자신들의 정서의 초상을 어떤 한 구절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참고로, 제이미슨의 그 구절은 Alan J. Pakula의 편집증 3부작(Paranoid Trilogy)중에서, <암살자(The Parallax View)>에 등장하는 한 인물에 대한 설명에서 비롯된다. 주인공(기자)은 음모를 밝히기 위해 패럴랙스 회사에서 모집하는 요원선출 시험에 지원하고, 나중에 이 회사에서 직원 한 사람이 주인공을 만나 합격을 통지하기 위해 파견된다. 그는 주인공에게 매우 상냥하고, 차분하며, 인간적인 유대감과 동정심 같은 것을 보여줌으로써(매우 놀라운 장면이었다), 함께 일할 동료의 우정과 신뢰를 다지는 방식으로 접근한다. 동료애는 회사에 대한 충성심으로 확대되고, 결국 주인공은 암살계획에 교묘하게 이용되어 죽음에 이른다. 제이미슨은 이 직원을 "음모의 대리인"이라고 지칭하면서,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체계와 기업의 대리인으로서, 무의식적 임무를 부여받은 이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지적하고 있다.


그의 글을 그대로 직역해서 옮기면, 아방가르드의 꼴라쥬나 정신분열자의 책상을 보는 것 같은 관계로, 약간의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의 습관적인 지각이 허용하는 한계 내에서, 우리가 그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주석을 첨가하고 의역하여 옮겨 보겠다.

" . . . [이 영화는] 음모를 수행하는 주체들을 특별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을 말해야 할 것이다. 즉 그 거친 사람들, 원흉들, 음모의 가담자들 중에서 한 사람은 조용하고 차분하며, 서두르거나 재촉하는 일 없이 사람을 상냥하게 대하면서, 마치 그것이 기업의 태도인 냥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 . . 이들은 [기업의 피해자들에 비해] 잘 차려입고, 잘 먹고, 말 그대로 개인적인 기질을 결여하고 있다[즉, 개인성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자신은 임무를 수행하는 역할에 불과함을 분명히 한다]. . . 이들은 비교적 우리 사회에서 특권을 함축하고 있는 자들이다. . . . 그러나 그들 역시 착취당하는 인물들이다. . . . 임무에 사로잡힌 자들, . . . 그러나 이들은 희생자들이 사로잡혀 있는 공포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임무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이 음모의 대리자들이 가지고 있는 근심(Sorge)은 웃는 얼굴로 신뢰를 보여주어야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그 임무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기업 차원의 문제이며, 네트워크 또는 제도의 존속이나, 추상적인 혼란이나 태만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 . . [그 추상적 혼란과 태만 속에서] . . . 이들은 모두가 . . . 집단적 조직 그 자체의 텅 빈 공간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개인으로서의 자신의 현존을, 강하면서도 상냥한 배려, 그 무게중심은 전혀 다른 곳에 있는, 즉 어떤 목적의식에 골몰해 있지만 동시에 거기에는 무관심한 친절에다가 쏟아 붓는다. 그러나 이 같이 전혀 다른 종류의 배려는, 비개인화되어 있으면서도, 또한 그 고유의 불안, 말하자면 개인의 행위에 대해 어떠한 개인적인 결과도 파생하지 않는, 무의식적이고 기업 차원의 불안을 수반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이 흘리는 땀은 이중의 책무에 복무하고 있다. 하나는 그 집단적 책임이라는 뱃지로서. 그리고 클로즈-업의 친밀감 속에서 느껴지는 모든 불쾌함의 실체로서[즉,땀이란 성실과 노력의 도덕적 기호이므로, 동료애나 친밀감을 내포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축축한 습기로서, 불쾌감을 자아낸다]. . . . [그래서 땀은] . . . 간혹 가다가 다른 감각 수준 위에 투사된 하나의 지표인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친밀함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발견을 뜻한다. 즉 우리가 무의식중에 하나의 집단적 네트워크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의 발견. 그리고 멜로드라마가 없이도 우리가 얼마나 쉽게 상처받는지를 입증해주는 그 생소한 육체적 온기를 우리가 깨닫기 전에, 심지어는 고독한 순간에도 조차, 우리들은 이미 너무나 가까워져 있다는 사실의 발견[여기서 제이미슨이 말하는 가까움이란, 서로 시선을 주고 받으면서, 의식 속에 스스로 각인한 타자성(otherness)에 의해 만들어진 관계에서 비롯된 부정적인 형태의 가까움을 의미한다]. 사르트르에서 푸코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들을 넘어 현대 페미니즘에서도, 시선(視線)은 특권적인 존재론적 공간이었으며, 그 공간 속에서 우리의 권력은 상실되고, 조작 가능한 객체들로서 극화되고 배치되었다. . . . [그것은 권력 공간, 즉 텅 빈 대타자(the absent Other)나 팬옵티콘 감시탑(Panopticon watch tower)을 투영하고 있다] . . . 음모는 승리한다. . . . 그러나 그것은 피해자들이 결여하고 있는 특별한 형식의 '권력'을 음모가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음모는 집단적인데 반해, 피해자들은 각각의 소외된 상태 속에서 전혀 집단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Fredrick Jameson, the geopolitical aesthetic: cinema and space in the world system, Indiana: Indiana University Press, 1992. pp. 65-66.) [ ]표시는 역자의 주석임.

<문예 노트>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