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예술의 기능을 그 본질과 동일한 위상에 놓았던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한 희랍신화를 새로 번역하는 가운데 예술의 기능에 대한 그의 심중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바로 오디세우스(Odysseus)와 세이렌(Siren)의 한판 대결에 관한 그의 코멘트(혹은 의문)가 그것이다. 그의 의문은 아주 간단한데, 요점은 이러하다: 오디세우스는 거짓말쟁이가 아닐까? 세이렌이 그 매혹적인 노래를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오디세우스가 그 유혹을 이겨냈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는가? 세이렌은 죽었고, 선원들은 귀가 막혀 있었고, . . . 돛대에 사슬을 묶고 그녀들의 노래를 들었다고 주장한 것은 이제 오디세우스뿐이지 않은가?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잊지 않는다.
이 천하 무적의, 닳고 닳은 여자들이 아무런 행동의 자유도 없는 사람들에게 정말 자기들의 예술을 낭비했을까? 그것이 바로 예술의 본질이란 말인가? 그래서 나는 오히려 그 마녀들이 뭔가 있는 힘을 다해 외치는 것처럼 뱃사람들이 본 것은, 실은 그녀들이 그 째째하고 소심한 촌놈에 대해 욕을 퍼부은 것이었으며, 우리의 주인공은 그래도 결국은 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짐짓 몸부림 친 것이었다고 믿고 싶다.(『상어가 사람이라면』, 한마당, 1993. pp.23-24)
결국은 예술의 기능에 관한 문제가 되겠지만("예술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보다도 우선 예술의 실현에 있어 그가 필요로 했던 것, 즉 예술의 조건은 바로 살아있는 관객이었던 것이다. 밀랍으로 틀어막아 아무것도 들을 수 없고, 쇠사슬로 몸을 묶어 소리 나는 쪽으로 접근할 수조차 없는 반수면 상태의 식물인간들에게 예술은 무슨 예술! 그래서 그는 무대 위에 끊임없이 낯선 장치들을 고안한다(중국 경극이나 스타니슬라프스키로부터 착안한, 행위의 분리, 대사의 인용, 인위적 연기나 제스처, 서사의 역사화 등). 그의 시도들을 현실과의 단절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무디어진 지각과의 단절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더 그럴 듯하게 무디어진 지각이 주조해낸 현실로부터의 단절이라고 불러야 할지. 어쨌든 어떤 경우든지, 그의 단절 프로젝트는 지각이든 현실이든, 그 도식으로부터의 깨어남이었고, 마치 하이든의 교향곡처럼, 수면상태의 관객을 깨우는 일이었다(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언제나 잠이 들지! 혹은 그들의 관객은 언제까지 잠을 자고 있을지!). 알튀세(L. Althusser)의 술어를 빌자면, '다중적 모순으로 충만한 실재'로의 외출이랄까? 그것은 마치 빔 벤더스(Wim Wenders)가 『베를린 천사의 시(Der Himmel Ueber Berlin)』(1987)에서 보여주었듯이, 모순 없는 영원한 시간 속에 살던 천사 가브리엘이 인간이 된 바로 그 순간부터 직면해야 했던 충돌이라든가, 아니면 전혀 다른 맥락에서, 역시 빔 벤더스가 『사물의 상태(The State of things)』(1982)의 초반 시퀀스에서 보여 주었듯이, 감독의 "컷(Cut)" 소리가 들리는 순간, 모든 인물들과 스텝들이 텍스트 밖으로 빠져 나와, 냄새가 나고, 시야가 트이고, 모순으로 충만한 대기의 소란한 충돌소리가 들렸던 것과 정확히 같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브레히트의 말은 바로 예술이 그 순간을 열어 젖혀야 한다는 것이었다.(문학에서는 러시아의 형식주의자들이, 그리고 그 유명한 영화적 충돌의 신화를 만든 에이젠슈타인도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따라서 브레히트가 고전시학 혹은 모방시학에 가한 그 비판이란, 따지고 보면, 그것이 너무나 진부하다는 것,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쏟아지는 하품과 그 찔끔거리는 눈물을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지긋지긋한 현실을 무대 위에서도 보라고? 맙소사! 흉내 낼 것이 그렇게 없단 말인가? 그것은 자연의 실상이 아니라, 그 도식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 권력관계를 깨지 않고서는 실상에 도달할 수가 없는 거야! 그러려면 당신들의 그 몽롱한 상태로는 불가능해! 일어나라고! 일어나! 어쨌든 브레히트는 살아있는 관객이 필요했고, 상연도 하기 전에 예술이 떠맡은 임무, 즉 졸고 있는 관객을 깨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그 임무가 예술의 본질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그의 시대, 후기 공장 자본주의 시대에 예술이 처한 조건이었으며, 세이렌에 관한 브레히트의 정치-경제-예술론이 의미했던 바이다. 사실 그 때만 해도 희망은 있어 보였을 것이고, 심지어는 생산력의 최대화라고 하는 그 시대의 야심 혹은 적의 구호에 몸을 싣고, 승리감에 도취된 전진 퍼레이드에 동참하는 것도 적지 않은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의 본질이 그러한 임무에 있다면, 한 가지가 궁금해진다. 관객이 잠에서 깬다면, 즉 밀랍이 뚫리고 밧줄이 풀어져 행동의 자유가 생겨났다면, 예술은 그들에게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실상, 살아서 저기에 저렇게 뻣뻣이 눈 부릅뜨고 깨어있는 관객이라면 굳이 예술이 필요할까? 그랬다면 예술은 그 기능과 본질을 달리해야 할 것이다. 브레히트 말대로 만일에 세이렌이 진정한 예술가였다면, 바로 그러한 과업, 저 무지한 뱃놈들을 좀 깨우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당시에 밀랍에 귀가 막힌 선원들이나, 우리 자신은 들은 바가 없으므로, 오디세우스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세이렌은 실패했다. 노래가 쳐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관객이 수면제를 먹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다: 예술은 아무 문제가 없단 말인가?
카프카(F. Kafka)? 그는 물론 예술가이고(브레히트보다도 더), 전혀 다른 관점의 소유자이다. 브레히트는 카프카가 시대착오적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카프가가 본질에 접근했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본질(특히 시대를 초월한)이란 행동 속에서가 아니라 관조 속에서만 드러나기 마련이다. 카프카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면, 바로 이 점일 것이다. 행동과 실천의 범주들 속에서 사유하는 정신은 카프카와 같은 식물학적 관점의 예술론이 변태스러워 보였을 것이고, 혹은 동물들의 울부짖음이나 식물들의 잠재적 운동처럼 지각이 전혀 불가능한 소리였을 것이고, 따라서 브레히트 자신의 야심찬 단절 프로젝트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프카 역시 세이렌을 예술가로 생각한 것에는 이견이 없었다. 다만 그는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의 노래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한줌의 밀랍과 한 다발의 밧줄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유치한 수단을 가지고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단-순-진-무식에 있었다고 생각했다. 무엇이든 뚫어 버리는 세이렌의 노래를 듣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그 무엇으로도 당해낼 도리가 없는 교만, 자만심이라고. 브레히트 말마따나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라 욕을 해대고 있었는지(브레히트 자신의 욕이기도 한), 아니면 밀랍과 밧줄만을 꽉 움켜쥔 오디세우스의 도취된 자만 혹은 단호함에 말문이 막혀서인지(이렇게 놓고 보니 카프카 역시 브레히트와 그 다지 멀리 있지만은 않다), 어쨌든 세이렌은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라 침묵을 하고 있었다고. 오디세우스의 눈에 비친 그녀들이 "고개를 돌리고", "깊은 호흡을 내쉬며", "눈물이 고인 눈"과 "반쯤 열린 입을 통해" 아름다운 아리아를 부르고 있었던 것은, 승리감의 지속을 위해, 그 교만을 보증하기 위해, 그 판타지와 공모하여 자신의 시(視)-지각-기억이 만들어낸 어떤 환각이 아니었을까?
예술가는 침묵하는 존재이다. 심지어 그가 노래를 부르고, 문장을 지으며, 표현을 하는 동안에도, 그의 본질은 언제나 침묵 속에 있다. 교만에 빠진 우리는 침묵을 바라보며 성급해지고, 그러다가 감춰놓았던 것을 우리 스스로 폭로해 버리고, 석연찮은 승리감으로 주춤해 한다. 그렇게 침묵 속에는 교만한 정신의 생장과 소멸의 드라마가 있다. 무서운 것은 세이렌의 노래가 아니다. 소수자(minor)와 마찬가지로 예술가의 언어는 바로 침묵이다―가령, 테오 앙겔로풀로스(Theo Angelopoulos)가 <울부짖는 초원(Trilogy: The Weeping Meadow)>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 바로 소수자의 침묵과 아코디언 연주의 상동관계처럼. 그 침묵의 소리가 단-순-진-무식이나 권력에 미약하나마 흠집을 내고 해를 가했다면, 그것은 대기에 퍼진 어떤 불안 때문일 것이다. 세이렌은 침묵을 들을 수 없는 교만한 정신의 소유자를 어떻게 대했는가?
". . . 그 섬뜩한 머리카락을 온통 바람결에 나부끼게 했고, 바위 위에서 발톱을 한껏 드러내놓고 힘을 주고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유혹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오디세우스의 커다란 두 눈이 뿜는 빛을 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변신(카프카단편전집1)』. 솔 출판사, 2003. p575.)
그러나 이제 정신을 차리고 우리의 얘기로 돌아와서. 우리의 무대 위에 서 있는 예술이란 과연 어떤 예술이란 말인가? 브레히트가 생각했듯이, 잠든 관객을 깨우는 예술? 아니면 카프카가 보았듯이, 식물과도 같은 침묵의 운동 속에서, 권력과 체계와 그 교만을 또렷이 주시하는 예술? 우리가 처한 실상에 따라, 나는 이렇게 말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세이렌이 실패를 했다면, 그것은 뱃사람들의 게으름 때문이 아니었다고. 그들은 죽은 것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잠든 것도 아니었다고. 교만은 더욱 아니었다고. 그와는 반대로 귀를 틀어막고, 몸을 칭칭 감아, 화려하고도 요란한 유혹들을 거부했던 것이라고. 화끈한 도시의 플레이보이가 유혹에 취해 한판 멋지게 놀아 보려다, 빈 주머니로 머리를 쭈뼛거리며 나오지 않으려면, 바로 저러한 결연한 단-순-진-무식이 아니면 안 된다고.
브레히트의 주문과는 달리, 우리 사회에서 살아있다는 것은, 오히려 아무 일도 안 하고 버티는 일, 귓구멍에 밀랍이 아니라 시멘트를 발라서라도, 그 유혹들을 듣지 않는 일이 아닐까? 수렁에 빠진 뮤즈의 딸 세이렌의 노래는 예술이 아니라, 바로 딴따라였다는 것! 그래서 그녀들은 더 이상 가여운 요제피나(Josephina)라든가 죽어가는 단식광대가 아니라, 대머리에 배 나온 율리시스(Leopold Bloom)가 드나들던 Ormond Bar에서 호객을 하며, 손님을 위해 젓가락 아니 포크와 나이프를 두드리며 몽롱한 노래들을 반복해서 불렀던 호스티스 미나(Mina Kennedy)와 리디아(Lydia Douce)였다는 것! 오디세우스의 그 단호함(그는 집에 가서 빈대떡을 붙여먹고 싶었던 것이다)에 좌절했던 것은, 그녀의 예술혼의 좌절이 아니라, 호객의 실패였다는 것! 더 이상 구매자가 없어, 더 이상 돈벌이가 되지 않아, 굶어 죽어가며 화장한 얼굴이 추해질까 봐 자살한 것은 아닐까? 소비유혹('당신은 특별한 사람입니다!'), 욕망의 조작과 단일화('삶을 드립니다!', '아름다운 세상!', '편리한 사회!',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그리고는 결국 다양성의 부정, . . . 이러한 것들이 바로 소비사회의 음모이고, 이 음모 속에서는 구매만 잘하는 관객이면 만사가 오케이! 아니면, 보다 고급스러운 취향을 선택할 줄 아는 관객, 그래서 보다 부가가치가 높은, 이윤이 높은 상품을 구매할 만큼은 깨어있는 존재, 한마디로 말해 도시적 취향의 세련된 관객이 필요한 것이다. 고다르(Jean Luc Godard)가 자신의 영화 『카르멘(Pre'nome Carmen)』에서 보여 주려고 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카르멘이라는 여인이 가진 아름다움의 바로 그 현대적 실체! 다시 말해 매디슨 애비뉴(Madison Avenue)의 끔찍하고도 소름 끼칠 만큼 정교한 심리학과 그 정신조작기술(psychic technology)에 의해 서서히 우리에게 역하(subliminal) 이식되고 있는, 그 진부하고도 판에 박힌 모델, 그리고 그 아름다움의 실체! 눈을 보지 마라! 걸려든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두 눈을 똑바로 떠서, 그 상투적 아름다움에 가려진 썩어가는 속살을 보는 일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반수면 상태의 우리를 홀리고 있는, 더욱 더 그 진부함의 황홀경에 빠지게 하는 눈을 쳐다보지 않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시대에 브레히트의 바램은 정말로 터무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공장 자본주의가 주류를 이루던 그의 세대는, 우리처럼 쇼핑몰 자본주의를 이해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다소 비관적인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감독의 컷 소리가 우리를 영화 밖으로 나가게 해주지는 못했던 것이다. 얼핏 보기엔 이사야의 예언과 비슷하게(실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바빌로니아 카페 앞에서 도깨비처럼 화장한 세이렌들의 춤판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차라리 영화보다도 더 영화적인 현실, 더 이상 모순이란 존재하지 않는, 따라서 충돌소리조차 들을 수 없는 현실이 촬영로케를 빠져나오면 찬란하게 펼쳐진다(백화점, 쇼우 윈도우, TV, 쇼핑몰, . .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화의 판타지를 내면에 아로새기는 훈련장, 학교!). 예술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관객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예술 자체의 딴따라 기질이 아닐까? 대중문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보다도 더 포퓰러한, 고급의 탈을 쓴 딴따라를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생포되어 오히려 선봉이 되었다. 심하게 말하자면, 총알받이가 되어, 첨병이 되어,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 예술은 더 이상 살아있는 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잠든자! 더 정확히 말해 아무런 불평 없이 예술을 소비해줄 구매자를 필요로 한다. 관객의 고급스럽고 세련된 취향과, 그러한 관객을 양산하기 위해 이런 저런 교육이 필요해지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신장 개업집 앞에서 한 짐을 풀어놓고 풍선을 날려가며, 저것이 경찰차의 협박 사이렌인지, 구급차의 공포의 사이렌인지, 소방차의 야단법석 사이렌인지, 아니면 짐 모리슨(Jim Morrison)이 무대 위에서 딸딸이를 쳐가며 중얼거리던 최면의 싸이키델릭 사이렌인지, 도무지 분간이 되지 않는 요란한 사이렌을 울려가며, 배꼽을 드러내고, 어수선한 도시 한가운데 왠지 모를 황량함이 깔린 아스팔트 위에서, 도대체 저 아이들이 누구를 위해 저렇게 길거리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것인지, 자신을 위해서인지, 고객을 위해서인지, 업주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신-민족성을 위해서인지, 짐 모리슨을 위해서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도취된 표정과 몸부림으로 흔들고 있는 나이 어린 세이렌들과, 어떤 어떤 거대한 상인들에 고용되어(딴에는 계약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량을 올리기 위해 떠들어대는 그들의 허풍과 과분한 찬사에 도취되어, 펜이나 붓을 휘저어대며, 문학상이나 비평가상이나 또 여타 무슨 무슨 상-수상-생산품을 제조해내는 자칭 뮤즈들과의 차이를, 나의 오성으로는 도저히 분간할 수가 없다.
카프카가 생각했던 침묵하는 예술가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 침묵을 들을 수 있는 경야(經夜)의 관객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리 아무것도 듣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오로지 스켄들을 암묵적인 모토로 삼으며 아무 뜻도 없는 쓰레기 같은 수다로 인생을 허비하는, 뉴스나 미디어의 주체가 바라는 세계를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세이렌이라고 하는 포스트모던 신화에 관한, 비관적인, 그러나 실상의 지도이다.
<문예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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