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푼크툼'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7/07/28 존재의 시간, 푼크툼 (11)
  2. 2006/10/05 푼크툼(Punctum) (4)

예전에 나는 바르뜨(Roland Barthes)가 쓴 사진에 관한 몇 가지 단상을 읽은 적이 있다. 거기서 나는 사진과 관련한 전문적인 지식을 별로 알아내지 못했으므로 곧 그 책을 기억에서 지워 버렸다. 그러나 한참 지난 후에 문득 이런 질문이 생겨났다: 사진에 관한 글을 쓰면서 그는 왜 사진의 이러저러한 지식에 대해 말하지 않았을까? 아는 것이 없어서?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어서? 그랬다면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 책을 통해 사진을 하나의 방법으로 접근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은 대체로 이미지에 의해 사물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사진을 방법으로 보는 것. 이는 결국 사진 뿐 아니라 사물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이며 동시에 그로부터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책 전체를 다시 훑어보면서 사실은 특정한 주제에 향해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바르뜨 역시 이 주제를 가장 흥미롭게 혹은 가장 중요하게 언급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주제는 의외로 단순한 구분에서부터 출발하는데, 그것은 사진이 발생시키는(혹은 우리가 발견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감정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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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뜨(Roland Barthes)는 사진에 관한 한 에세이(Camera Lucida: Reflections on Photography. Eng Trans by Richard Howard. New York, Hill and Wang, 1981)에서, 우리는 어떻게 사랑에 빠지는가를 “푼크툼(punctum)"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처음에 나는 이 생소한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 이 단어에 속하는 몇 가지 술어들을 찾아내었다. 사전적 정의로부터(점(點), 순간, 날카로운 것, 자극하거나 찌르는 것, . . .), 그것이 환기하는 의미까지(욕망의 부분대상, 물신주의적 환유, 프루스트적 의미에서 비자발적 추억을 불러들이는 징후, 사물들이 종합되는 순간 그어진 사선, 특정한 감정을 촉발하는 파문, . . .). 나는 이렇게 많은 술어와 의미들을 열거하고 난 후에 이들을 종합하여 다음과 같은 잠정적인 결론을 도출해 내었다: 아마도 주체가 예술작품이나 인물과 같은 특정한 대상을 만나게 될 때 우연히 그를 자극하는 이미지. 또한 그것은 대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서 우연적이긴 하지만, 그가 발견한 이미지. 이제 나는 경험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자주 뇌리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하나씩 되새겨보면서, 그것들이 푼크툼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미지들은 곧 사라져 버리기가 십상이었고, 더구나 억지로 떠올린 이미지들로 가득 차 버려서 나를 기쁘게 하지도 못했다. 또 이미지들은 다른 의미들을 불러오지도 않고, 텅 빈 그림들만 내게 현시 될 뿐이었다. 결국 나는 푼크툼이 무엇인지 경험해보지 못했고, 몇몇의 그럴 듯한 술어들만 암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친구를 만날 때면 가끔 드나드는 식당이 있다. 그곳은 서구적인 분위기를 내기 위해 실내를 한껏 장식했고, 벽과 천장에는 커다란 서구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테이블들 사이에 놓인 칸막이 난간에는 빈양주병들이 놓여있었다. 웨이터와 웨이트레스가 분주하게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앉아있는 손님들로부터 새어나오는 수다스런 소리. 어둠침침한 조명들 사이사이를 휘감고 오르내리는 담배연기. 출처를 알 수 없는 멜로디. 주방과 테이블에서 풍겨 나오는 음식 냄새. 이 냄새는 서로 엉키고 섞여서 각각을 구별할 수 없이 그냥 시큼하고 불쾌한 냄새가 되어 버렸다.

웨이터와 웨이트레스들은 검은색 조끼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목과 가슴부분, 그리고 팔은 흰색 와이셔츠가 드러나 있었다. 흰색과 검은색이 실내의 조명과 잘 어울렸다. 대비가 강한 두 색은 산뜻해 보였지만, 아마도 눈을 자극하기 위해 고안된 지배인의 시각적 조작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걸친 옷에만 조작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모두가 비슷한 톤으로 손님들과 사무적 대화를 나누었다. 제각각 다른 얼굴 모양새였음에도, 신분과 역할을 의미하는 동일한 미소가 한결같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친절하고 정중하게 손님들을 대했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미소와 말투는 나를 불쾌하게, 아니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의 불쾌감은 따지고 보면 신경증적 불안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그들 뿐 아니라 나 역시 이러한 대면이 반복되면서 무감각해 질 것이다. 아무런 기대도 호기심도 없는 무감각.

특히 나를 불쾌하게 했던 것은 그 식당의 지배인쯤으로 보이는 사람의 태도였다. 손님이 오면 테이블로 안내하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뒤, 손님을 보면서 미리 마련된 미소를 내보인다. 언제나처럼 메뉴를 건넨 후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갔다가, 적당한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옷매무새와 표정을 점검하고 나서 주문을 받으러 온다. 레스토랑이니 카페니 하는 곳은 항상 이런 식이다. 이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서로가 공통하지 않은 목적들을 가지고 각자만의 방을 가지기 위해 이곳에 모인다. 누가 이곳을 사교모임의 장소라 했을까? 현대 사회는 이곳을 특이한 시장으로 만들었는데, 여기서는 환상이 거래되고 있다. 이곳이 사교모임의 장소라는 말은 틀린 말이지만 또한 동시에 옳은 말이다. 어쨌든 그 지배인은 언제든지 이곳이 시장임을 상기시킨다. 그에 대한 나의 불쾌감은 아마도 거기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몇 살 정도인지를 가늠해 보려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젊은 나이임에는 틀림없지만, 20대인지, 30대인지, 혹은 40대인지 조차 구분이 되질 않았다. 아마도 그가 취하는 제스처나 의복 등이 나이를 말해주는 어떠한 기호도 가지고 있지 않은 탓이었을 것이다. 동일하게 프로그램화된 그의 말투 역시 그를 어떤 사람인지 모호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통일감을 자아내기 위해 고안된 유니폼 제도는 개인이 모호해지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그 완성을 이루었다.

이렇게 모호한 이 식당은 내게 불쾌감을 주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지루했기 때문에, 내 관심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의 불쾌감은 금세 사라질 수 있었으며, 나는 더 이상 이 실내의 분위기와 사람들로부터 시선을 떼기 시작했다. 이곳은 더 이상 나의 흥밋거리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변화 없이 단단한 것들, 동일한 반복이 계속되는 것들은 언제나 지루함과 태만을 낳는다. 내가 이 고급 식당에서 보고 있는 시각적 조작이나 사무적 몸짓 그리고 모호함 등을 그럭저럭 긴 시간 동안 견딜 수 있었던 까닭은, 아마도 그 모호함이 더 이상 나의 시선을 붙들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래서 나 역시 그들로부터 무감각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시스템이나 권력이 그렇게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가 아닐까? 그것은 저 먼 곳에서 신비한 광채를 띤 채 공포나 불안에 호소하기보다는, 아무런 미동도 들키지 않을 만큼 아주 가까이에서 지루함과 태만에 기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또한 사교계의 본질이기도 하다. 유한부인들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왜 그렇게 하품이 나오는지.

어쨌든 나는 이 식당에서 특별히 긴장하거나 호기심을 가지지 않은 채, 편안한 마음으로 친구와 함께 여느 때처럼 담소를 나눌 수가 있었다. 내 시선은 마주 앉은 친구의 모습과 실내 사람들의 움직임, 그리고 이리저리 바쁘게 걸어 다니는 종업원들을 번갈아 가며 훑어 내리고 있었다. 웨이터들은 경직된 표정으로 지배인의 눈치를 보면서, 그의 시선에 오랫동안 남아있지 않기 위해 괜히 이곳저곳을 움직인다. 그 지배인은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휘하에 있는 종업원들에게 위엄을 보이기 위하여, 어른스러운 몸짓과 어투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그는 자신의 앞에 다가온 종업원에게 넌지시 친근한 어투로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노력이 관계를 더 나은 쪽으로 이끌지는 못할 것이다. 지배인은 이를 아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며, 심지어는 더 나은 관계를 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다만 종업원들이 자신의 직분에 더 충실할 것을 요구했던 것  뿐이며, 그 직분에는 지배인에 대한 성심(존경은 아닐지라도)과 경애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이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 단순한 계약관계에 놓여있었지만, 그 계약의 심층에는 훨씬 더 한 것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농담은 음흉한 것이었고, 이를 눈치라도 챈 듯 종업원들은 모두 그 농담에 거리를 두곤 했다.

종업원들 중에는 근사한 모습을 한 웨이트레스가 있었다. 중간쯤 되어 보이는 키이지만, 날씬한 다리와 잘록 들어간 허리. 특히나 유니폼이 그녀의 가냘픈 몸매를 한껏 드러내어 주고 있었다. 유니폼이란 항상 저런 미인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니폼이 우리를 참담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이리저리 분주하게 손님들을 접대하는 그녀의 모습은, 종업원이기보다는, 젊은 귀부인이 자신의 친구들을 초대해 만찬이라도 베풀고 있는 듯 우아해 보였다. 하얀 유니폼의 소매보다도 더 맑아 보이는 손등. 접시를 내리고 올리는 팔이 드러내는 포물선의 자취. 경박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살짝 안쪽으로 당겨 접은 턱. 아래로 떨군 눈매에 길게 드러난 검고 고운 속눈썹. 그녀는 이 모든 동작과 표정들을 어떻게 연출해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는 듯 했으며, 타인들의 시선과 갈채를 스스로 품은 채, 자신의 연출에 도취되어 나르시스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듯 했다. 그녀의 시선이 언제나 아래로 향해있는 것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 눈동자는 늘 자기 자신으로 향해 있었다.

한참이나 후에 깨달은 것이지만, 지배인은 그 웨이트레스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누가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듯이, 그는 아마도 그녀가 연출하거나 그녀 자신도 모르게 발산한 수많은 질적 이미지들에 매료되어 취해버렸을 것이다. 우선 그의 시선에 그녀가 들어올 때면 표정이 달라진다. 그녀가 다가와 그에게 사무적인 질문이나 의견을 말할라치면, 그는 시간을 지연시키기 위해 불필요한 다른 질문들을 도리어 던지기 시작한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해도 그녀와 관계있는 모든 것들에 긴장하고 민감해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금세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때의 그 태도와 몸짓은 더 이상 지배인의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그녀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때로는 그녀의 동정심에 호소하기 위해, 또 때로는 자신이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지위를 이용해, 그는 끊임없이 그녀 주위에서 배회하며 이리저리 자리를 바꾸어 가면서 어지러운 선분들을 허공에 그어대고 있었다. 그러나 지위와 권력이 보증했던, 그래서 단단하고 강하게만 보였던 그의 위엄은 너무나 왜소하고 보잘것없는 것이 되어버렸으며, 자신의 달콤한 타락을 깨닫지 못한 채, 공포와 태만 위에 군림한 힘이 아니라 기쁨을 주관하는 더 위대한 힘에 굴복해야만 했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뒤바뀌어 있었다.

그는 지금 그녀를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특별한 미소를 보내고 있다. 그 미소는 직분을 수행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냉정히 가다듬으며, 최소한 당신과 나 사이에 별 일이 없기를 바라는, 그러한 두려움을 품은 미소가 아니었다. 그녀가 그 푼크툼을 발견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 미소는 어쩌면 나에게만 들켜버린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순진하고 앳된 미소. 최초로 그 특별한 미소를 내가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이 푼크툼임을 단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쑥스러움을 가리기 위해 그녀에게 살짝 곁눈질을 하며 흰 치아를 드러냈지만, 그 표정은 나에게 그의 모든 본질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혼자 있을 때, 친구들과 어울릴 때, 어렸을 적에 등등, . . . 자라온 일생만큼이나 긴 시간동안 그와 함께 있었을 그 표정을 다 읽어낼 수가 있었다. 그러고 나니 그의 속살들이 마치 물속에서 색종이가 퍼지듯이 하나 둘씩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는 아주 오래 전부터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청년이었을 것이다. 나이는 20대 후반쯤. 확실히 그는 앞에 다소곳이 서 있는 저 웨이트레스를 사랑하고 있다. 특히 그의 손목에 찬 시계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따분한 복장규칙이 적용되지 않고 자유가 허용된 몇 안 되는 신체의 자투리 구역에, 그는 환심을 살만한 온갖 전리품을 달아놓고 싶었을 것이다. 젊은 학생들이 즐겨 찾는 스포츠용 방수시계. 점잖은 양복 유니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목에 걸린 핸드폰. 그녀에게 젊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어쨌든 나는 그의 촌스러운 취향을 알아버리고 말았다.

아마도 오랜 시간동안 그와 함께 지낸다면 이러한 푼크툼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될 것이다. 푼크툼은 순식간에 뚜렷이 돌출하기도 하겠지만, 아무도 모르게 아주 천천히 주체의 기억과 감각 속으로 스며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떠나가 버린 사람을 사랑했음을 깨닫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 지배인은 내게 들켰던 것들 보다 더 강도 높은 푼크툼을 그녀에게서 보았으며, 그의 사랑은 아마도 이렇게 시작되었을 것이다. 내가 그를 더 이상 (어디든 널려있는 혹은 누구여도 상관없는)지배인으로서가 아니라 유일한 그 사람으로 볼 수 있게 되었듯이, 푼크툼은 섬세한 눈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한 사람으로 하여금 섬세한 눈을 가지게 한다. 그가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이 남다르듯이. 사랑이란 일종의 특이화(specialization)인데, 사랑과 관계하는 모든 용어들은 바로 저 의미를 향해 있다(그러나 부르주아 사회는 이 사랑을 경쟁과 독점적 소유의 문제로 해석해 버림으로써, 우리 자신을 비참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물론 푼크툼의 발견은 기쁨이나 사랑에만 관련된 것은 아니다. 그를 통해 야비함이나 포악함 혹은 역겨움 등을 볼 수도 있다. 또한 사랑의 대상을 전혀 엉뚱한 존재로 치환해 버리기도 한다. 바르뜨는 앤디 워홀(Andy Warhole)이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있는 사진(Duan Michael 1958)을 보면서 워홀의 손가락에 혐오감과 역겨움을 느꼈다(Barthes. Camera Lucida, 45). 손톱을 짧게 깎아 손끝의 살이 마치 손톱을 감싼 것처럼 둥글고 연하게 보이는 손. 그는 이 손가락과 관련된 앤디 워홀의 어떤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 손가락을 닮은 다른 사람에 대한 혐오스러운 기억이 떠올려진 것일까? 현실은 우리에게 항상 좋은 것만 보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들을 더 많이 보게 한다. 그것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기도 하고 슬픔을 주기도 한다. 어떠한 대상을 완전히 파악하고 그것을 지배하여, 그 대상의 조야한 본질을 파악하게 되면, 우리는 거기에서 역겨움이라는 새디즘적 고뇌에 빠지기도 한다. 내 본성과 잘 어울리지 않는 다른 본성에 대한 일종의 알레르기나 메스꺼움이라고 할까?

어찌 되었든 이런 경우에도 푼크툼은 존재를 살아있는 것으로 만든다. 보다 정확히 말해 그것은 집단적 환영이 만들어낸 우리의 망상이나 믿음을 변질시킨다. 그래서 나의 망상에서 비롯된 사랑하는 사람의 순수한 이미지조차 변질되어 생생한 실제의 장소에 위치하게 된다. 존재는 두 번 변질되어 불순한 이미지로 뒤바뀌는 것이다. 푼크툼은 존재를 이중으로 변질시키면서, 심지어 사랑조차도 타락의 세계로 끌어내린다. 혐오감을 없애기 위해 짙게 화장한 시체의 코에 살짝 내려앉은 검은 반점(Roland Barthes. A Lover's Discourse: Fragments. Eng Trans by Richard Howard. New York: Hill and Wang, 1999. p. 25). 부패의 징후. 사랑으로 채색되었던 나의 신념과 최면은 이 점 하나로 인해 송두리째 전복되기 시작한다. 사랑의 대상은 평범한 존재가 되어 실제의 세계에 놓이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푼크툼은 사랑을 지나 연민으로 가는 통로인 것 같다.

<문예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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