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rgson

기억의 두 수준

베르그송에 따르면 기억은 두 경향성으로 나뉜다. 즉 기억의 관점에서 나누어지는 시간의 두 수준이 존재한다. 하나는 현재 쪽으로 또는 가까운 미래 쪽으로 달려가는 경향이다. 이것은 생명체가 살기 위해 임박한 필요에 부응하는 것으로, 현재의 지각 대상을 신속히 인지하고 식별한다는 목적을 갖는다. 베르그송이

채플린과 키튼: 휴머니즘적 도구주의와 무정부주의적 기계주의

채플린의 코미디 ‘소극’(burlesque)은 계열들의 조우와 충돌의 집합이다. 즉 행동의 계열들이 있고 이 계열들 사이에 다른 계열이 삽입되어 질서 전반이 엉켜 버리는 것이다. 여자와 춤을 추다가 다른 여자의 춤으로 끼어든다든가, 길을 지나가다가 앞에서 다가오는 소년과 마주치면서 소년에게 지팡이를 낚인다든가, 국수를 먹다가

우정

친구는 눈을 감아주는 사람이다. 그는 결점과 오류들을 이해해 준다. 친구는 내가 보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은 나의 실상을 들추어내거나 따져 묻지 않는다. 그는 나를 덮어주고, 망을 보아주고, 곁에서 시름과 고통의 위안이 되어주며,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고마운 사람이다. 우정은 사랑처럼

⸢들뢰즈의 씨네마톨로지⸥ : 증후비평과 창조적 소멸

들뢰즈(Gilles Deleuze)의 두 권의 책 <씨네마>는 “이미지”를 존재론적으로 다룬 이미지-존재론이다. 이미지를 의식의 능동적 행태의 과정으로 파악했던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의 이미지론(<상상력>과 <상상계>)과는 대립하는 위치에서, 사르트르가 간과했던 틈새(영화!)로부터 또 다른 형식의 이미지론이 구성된 것이다. 들뢰즈에게 이미지는 의식 이전에 물질-운동-빛이라는 존재론적 근거 위에서

의미의 창조

흔히들 의미가 미리 주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과의 관계에 의미가 있을까? 이 일이 의미가 있을까? 의미가 원래부터 그 일과 그 사람에게 주어져 있기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이 논리는 좀 이상합니다. 거기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는 누가 결정한단

정감(affectio)과 정동(affectus)

정감(affectio)과 정동(affectus)

정동(affects, affectus)은 몸체 안에 내재하는 시간의 비의식적 흔적이다. 흔적일 뿐만 아니라 몸체의 변화에 따라 표면으로 피어오르고 사라지는 효과이자 자취이다. 이에 반해 affectio, affection은 몸체 내부의 이러한 정동에 대한 감각, 양상, 작용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베르그송이 “정동적 감각”(affective sensations)이라고 불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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