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분자

공포분자

권력은 항상 공포를 이용해 대중 다수를 통제해 왔다. 초자연적이고 주술적 대상으로서의 자연의 공포, 구원과 처벌이라는 허구에 심리적인 개연성을 보장하는 보편적 죽음의 공포 등. 어떤 점에서 인류의 역사는 공포와의 싸움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외부의 힘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것과의 싸움은 권력이 대중의 마음 속으로 잠입할 수 있었던 주요 서사의 테마이다. 권력은 공포로써 자신의 필요를 역설한다.

자연 현상에 대한 주술적 해석이 초래한 원시적 공포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킨 서사는 과학이었다. 주술이나 초자연적 현상 또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자연의 배후에서 우리에게 벌을 주거나 보상을 주는 어떤 살아 있는 인격체와의 일체감을 전제하는데, 과학은 바로 이 존재와의 심리적 관계를 끊어버린 것이다. 과학적 지성의 빛 속에는 자연을 지배하는 인격적인 배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자연은 단지 수학적 계산과 예측이 가능한 사물(死物)들의 기계적 배열 또는 표면적 대응관계일 뿐이다. 물론 자연은 여전히 무시무시한 공포를 준다. 그러나 그 공포는 우리가 처벌을 부르는 죄를 저질러서가 아니라 우연적 변화율을 아직 계산하지 못한 지능의 한계 때문일 뿐이다. 단지 풀어야 할 과제로서 ‘자연재해’나 ‘천재지변’이라는 말에는 이 우연에 대한 과학적 낙관주의가 배어있다. 때로는 이 몰-공포가 파멸의 요인이 되기도 하지만.

그런 점에서 과학 지식의 진보는 비합리적 공포를 통한 정치적 통제로부터의 해방을 실현시킨 동력처럼 보인다. 불합리한 두려움을 이겨낸 현대적 인간은 자신이 정치적 주체로서 다시 태어났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현대는 새로운 형태의, 더 많은 유형의 공포들을 탄생시켰다. 어떤 점에서 과학은 인간이 자연 안에서 자연에 대한 그릇된 오해 때문에 겪은 공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자연을 능가하는 공포, 즉 합리적 공포들을 창조해 왔다.

현대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또 하나의 공포: ‘차이에의 공포’. 다른 인종에 대한, 다른 국가에 대한, 다른 계급, 다른 문화, 다른 인간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적대. 차이의 공포는 개인과 집단을 자기 중심적으로 고립하게 하고, 잠재적 불화를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익숙하고 친숙하고 평온한 일상에 낯설고 불편한 적이 난입할까봐, 우리는 항상 불안하고 두렵다. 이 밖에도 인류는 핵의 공포, 범죄의 공포, 미국 발 테러의 공포(즉 테러의 테러), 물리학과 천문학의 서사에 의한 우주의 공포 등에 휩싸여 있다.

이제 우리의 서사로 돌아와서.

한국 사회를 지배? 또는 지탱?해 왔던 두 개의 커다란 공포: 근면 성실하게 묵묵히 일할 것을 설득하는 “경제가 어렵다” 즉 “빈곤에 대한 공포”, 그리고 적(?)이 언제 쳐들어 올지 모르니까 서로 흩어져서 갈등하지 말고 한 목소리로 단결하라고 경고하는 “붉은색에 대한 공포”. 이 둘은 서로 한 몸으로 붙어있는 두 개의 머리이다.

인간에게 경제가 어렵지 않은 적이 있었나?ㅡ경제학자가 아닌 나는 오늘날 “경제가 어렵다”는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 정치적 명제를 과연 경제학자들은 알고 있을까? 산업은 물건들만 대량 생산한 것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빈곤에 대한 공포도 대량으로 생산했다. 백화점 쇼윈도에 진열된 상품들이 찬란해질수록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가 대기 전체에 퍼진다. 미디어가 퍼뜨린 이 공포 덕분에 우리는 하루 10시간 이상—그 마저도 자리가 별로 없다—을 기계처럼 일해도 힘들지가 않다. 일이 보장하는 밥 때문에 두려움이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정신 없이 일을 하다보니 잠시 잊어버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상하게도 고된 노동은 우리를 편안하게 해준다. 편한 휴식이 오히려 불안하고 두렵다. 한편 빈곤에 대한 공포는 모든 자원의 고갈에 대한 불안 속에서 타인이 빼앗아 갈지 모를 내 몫을 서둘러 챙겨야 한다는 경쟁의 강박에 시달리게 한다.

빈곤에 대한 공포가 우리를 유순하고 근면하면서도 악착같은 노이로제의 소유자로 만들었다면, 붉은색에 대한 공포는 우리를 적대감으로 단결하게 한다.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 단결은 증오에 기반한다. 그러나 무엇을 증오하게 하나? 핵? 전쟁? 아니다, 빨갱이다. 그런데 빨갱이는 누구인가? 공산주의자다. 공산주의자란 누구인가? 지주와 자본가의 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빈곤에 대한 피해 망상과 붉은색은 서로 연결된 몸통이자, 지배 기득권의 불/투명 창이라 할 수 있는 한국 미디어의 무의식적 표제다.

여기에 세 번째 공포를 추가하고 싶다. 이번엔 정치-경제적 공포가 아니라, 반대자나 불만자가 있을 수 없는, 증오할 수도 없는, 과학적 공포, 합리적 공포, 생물학적 공포, 즉 바이러스의 공포다. 이것이 점점 강하게 다가온다. 바이러스 공포는 오래 전부터 인류를 괴롭혀 온 자연적 현상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에 이견의 여지가 없어 보이지만, 과학 지식과 현대의 미디어와 결합하여 새로운 형태의 정치 공작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쩌면 바이러스 공포는 다른 모든 공포의 메타포인지도 모른다. 바이러스를 설명하고 해석해주는 사람들은 주술가나 성직자나 정치가나 자본가가 아니라 전적으로 과학자들이라는 점에서, 그 실체를 양적으로 지표화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과학이 종교가 된 현대에, 성직자가 설파하는 사후세계를 믿지 않을 수는 있지만, 과학자나 의사가 선언하는 바이러스의 실체를 믿지 않을 수는 없다. 그리고 과학이 정치적 통제 하에 있는 한에서 바이러스는 과학의 객관성으로 슈가코팅되어 이데올로기 투쟁이나 이견이 배제된채 정치적 공포로 다가올 수 있다. 정치 권력은 바이러스를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적으로 발생한 바이러스조차 정치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이러스의 공포는 붉은색의 공포와는 달리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가 아니라 ‘뭉치면 죽고 흩어져야 산다’이다. 그것은 분노로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분노를 삭이고 침작하게 조심하며 피해야 할 대상이다. 바이러스의 공포에 사로잡힌 인류는 서로 멀어지고, 무감동하며, 냉각되어 간다. 이상하게도 언제부터인가 커다란 정치적 사건의 주변에는 바이러스의 출몰이 목격된다. 한 쪽이 뜨거워져야 할 때,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종잡을 수 없는, 그러나 과학적 알리바이에 의해 그 실체는 객관적으로 묵인되는, 이미 근대 유럽을 조직화하고 규율화했던 흑사병처럼, 통제의 수단으로서의 보편적 공포가 다른 어두운 한 쪽에서 야금야금 그 정치적 열기를 과학적으로 냉각시키는 절묘한 타이밍을 구사한다. 우리가 논쟁하고 저항할 때 그들은 붉은색을 제시한다. 그러나 우리가 뭉치고 단결할 때 그들은 불신과 냉소와 경계의 천연적 조건인 바이러스—이번 국정농단 사태엔 너무 뜨거워 그 마져도 실패한 듯 보이지만, 실은 미세하게나마 작동하고 있는—를 제시한다. 다중적 딜레마에 봉착한 우리는 뭉칠 수도 흩어질 수도 없는 곤란에 빠진다.

공포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