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 사냥꾼

낙타 사냥꾼

르느와르(Jean Renoir)가 비판했던 인간 유형은 무리집단이 강요하는 역할에 사로잡혀 자신의 본성(정동, 몸)에 무지한 인간, 니체(Friedrich Wihelm Nietzsche)식으로 말하자면 “낙타”였다. 르느와르는 마네(Edouard Manet)의 회화처럼 영화를 찍었던 사람이다. 따지고 보면 낙타는 모든 예술가들과 철학자들의 공통의 대상이다. 덮어놓고 남이 하는 대로 따라하거나, 우정이 최고의 미덕인줄 알고 하이에나떼처럼 우루루 몰려다니거나,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낙타만 바라보고 있거나, 잘 나가는 낙타들에만 어울리고 싶어하는 부류가 대표적으로 그런 축에 속한다. 낙타는 지배 계급이든 피지배 계급이든 가릴 것 없이 어디에나 존재한다. 르느와르는 The Golden Coach라는 작품에서 연극을 관람하는 두 부류의 계급을 통해 이러한 낙타의 존재를 보여주었다.

18세기에 남아메리카를 점령한 스페인군 총독 바이스로이는 식민지 민중과 귀족들을 달래기 위해, 셰익스피어 시대의 영국 왕실이 그랬듯이, 자신의 관저 근처에 전용 극단과 극장을 차려놓고 정기적으로 연극 공연을 주최한다. 이탈리아에서 온 한 극단이 귀족들을 위해 무상으로 공연을 해주고, 대신에 민중들로부터 돈을 받고 공연을 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는다. 극단이 이탈리아 코메디를 공연하게 되는 것으로부터 이 영화는 시작된다. 민중들을 위한 초연은 관객의 싸늘한 반응으로 시작한다. 땅에 파묻혀 사는 농부, 남의 일이라면 이골이 난 노동자, 빨래와 밥 짓는 일만 평생 해온 부녀자들로 이루어진 음울한 관객들이 외국의 코미디를 알 리가 만무했다.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이들은 경전을 듣고 있는 송아지들처럼, 아니 교양수업을 듣고 있는 대학생들처럼 눈만 멀뚱멀뚱 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관객이 배우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무대 위에서 관객을 바라보고 있는 배우들에게 웃음이 부재한 객석 아니 식민지 전체는 일종의 재앙이었다.

차가운 반응은 두 번째 날에 관객으로 들어온 귀족들도 다르지 않았다. 물론 귀족이란 또 다른 형태의 무지렁이들이기 때문에, 이들 역시 코메디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설사 일부 교양을 갖춘 귀족들이 코메디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치더라도, 공연을 보면서 솔직 담백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위인들은 아니었기 때문에, 누군가 먼저 웃어주기를 기다리며 흘깃거리는 눈초리로 부채질만 해댄다. 그렇게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웃음을 참고 있었다. 우리가 교양을 위선과 동일시 한다면, 그 이유는 교양이라는 것 자체가 어떤 조심성과 은폐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양은 집단적인 현상이고, 집단을 벗어났을 때 교양은 무너진다. 따라서 교양인은 어떤 의미에서든 튀지 않아야 한다. 더우기 감정이 표출되지 않게 하려면 반드시 몰려다녀야 한다. 웃음을 참지못해 감정을 터뜨렸을 때 받게 될 그 이유 모를 텅 빈 비난의 눈초리들은 교양인에겐 사형선고이기 때문이다. 귀족들의 교양이란 한 마디로 말해 위험하지 않은 그냥 밋밋한 따분함일 뿐이다.

그러나 민중-낙타든 귀족-낙타든 결국은 웃을 수 밖에 없었는데, 그들 중에는 우상(Idol)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중들 사이에는 당대에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투우사 라몬이 있었고, 귀족들 사이에는 자신들을 지배하는 영국군 총독이 있었던 것이다. 공연이 끝난 후 라몬의 웃음과 박수소리(실은 다른 이유, 즉 여배우가 마음에 들어)가 들리자 그제서야 민중들은 공연이 자신들을 구원해줄 찬송가라도 된 듯이 괴성에 가까운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터뜨린다. 그 후로 민중들 앞에서의 공연은 승승장구한다.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연이 끝난 후 한 동안 아무 박수 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 이 때 총독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 중이었다. 불을 붙인 후에 총독이 박수를 치자, 그제서야 귀족들은 하이에나떼처럼 주변을 기웃거리며 조심스러운 박수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결국 두 공연 모두 마지막엔 많은 박수를 받으며 성공적으로 막을 내린다.

어떻게 하면 이 낙타들의 왕국을 깨뜨릴 것인가? 어떻게 하면 크리스탈 안에서 아우성을 치며 빙빙 돌아가는, 자신에게 부여된 뜻모를 역할들을 연기해대는 낙타-배우들의 왕국으로부터 쏟아져 나와 자신의 본성적 삶으로 나아갈 것인가? 이것이 르느아르가 끊임없이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던진 질문이었고, 영화와 예술로부터 그 미래 비전의 동력을 찾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화와 예술에도 역시 낙타들, 더 역겨운 낙타들이 매복해 있음을 그는 알게 되었을 것이다.

계급을 막론하고 낙타들이 존재하듯이, 그것은 프랑스나 독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르느아르나 니체와 같은 위대한 낙타 저격수를 가지지 못한(혹은 아직 발견하지 못한) 한국에는 더욱 더 무성하게 빙빙 돌아가며 들끓고 있다. 아래의 두 기사를 참고하자.

http://goo.gl/ynJUz

http://goo.gl/czLB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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