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지 말라, 생각하라

행동하지 말라, 생각하라

현 자본주의 체계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동적인 이행(운동, 행동)이 아니라 바틀비(Bartleby) 식의 정적인 역동이라고 열렬히 외치는 지젝(Slavoj Zizek)ㅡ그는 혹시 Deleuzian인가? “마치 책상을 정리 하듯이”, 혹은 카드의 패를 다시 섞거나, 다시 던지기 위해 주사위를 양손에 모아 이리저리 흔들어 대듯이, 이미 가시적으로 결정되어 가동되고 있는 체계에 대한 별 효과도 없는 물리적 타격 보다는, 체계 그 자체의 붕괴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행동이란 체계ㅡ경제적이든, 물리적이든, 그 밖의 다른ㅡ의 조건 안에서 실행되고 완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행동성에 사로잡힌 주체는 불가피하게 체계 내부에서 체계의 실행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사이비-행동성(pseudo-activity)의 실행자로서의 지위를 거부하고 그 기능을 멈출 때에만 비로소 체계 외부로부터의 사유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생각만 하고 앉아 있으면 되는 것일까? 행동보다도 더 위협적이고 유효한 생각이란 무엇인가? 아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를 행동의 외부에서 유심히 바라보는 것, 그리고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고 있었던 무의식적 체계로부터 단절 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행동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의미와 그 행동이 불러일으킬 변화와 긍정적인 힘을 발견해 내는 것. 결국 “생각하라”는 주문은 행동의 배제가 아니라 행동의 재프레임화(reframing)의 조건을 “창조하라”는 주문과 동의어처럼 들린다. 세계에 대한 해석을 비판하고 변화를 주문했던 마르크스의 테제가 묘하게 우회로를 거쳐 재확립되고 있는 것이다.

“시장을 없애기 위해 과거의 노예상태와 주종관계로 퇴보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 . . 예컨대 소련은 통화시장경제의 지배를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로 폭력적이고 직접적인 주종 관계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직접적 지배 말입니다. 이제는 공식적으로도 도망칠 수가 없게 된 것이었죠. 질서에 복종해야 하고, 새로운 권위주의 사회에 복종해야 했던 겁니다. 마르크스의 정식인 “철학자는 해석만 해왔다. 이제는 변화 시킬 때이다”는 이제 바뀌어야 합니다. 20세기는 지나치게 빨리 세계를 변화 시키려고 했습니다. 이제 다시 해석을 할 때입니다. 생각을 해야 합니다. . . .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거나, 끔찍한 일을 겪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냥 앉아서 생각만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을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꼼꼼히 생각해보자는 말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오바마(Barak Obama)에게 실망하는 일이 유행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저에게는 이 실망 자체가 충격입니다. 사람들은 오바마가 미국에 사회주의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진행되고 있는 보편적 보건(universal health care) 문제에 관한 논쟁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는 아주 대단한 일입니다. 왜? 하나는, 이 논쟁은 지금까지 미국의 일반화된 이데올로기의 근본적인 뿌리에 세금을 매긴 것입니다. 어떤 이데올로기였습니까? 바로 “선택의 자유”라고 하는 이데올로기입니다. 국가는 우리로부터 자유를 빼앗으려 한다 등등, . . . 제 생각에는, 오바마를 공격하면서 공화당 사람들이 사용하는 이 “선택의 자유”가 바로 그와 같은 순수한 이데올로기입니다. 그러나 보편적 보건은 뜬구름 잡는 짓이 아닙니다. 이것은 급진적인 좌파의 개념도 아닙니다. 그것은 세계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며, 또 기본적으로 비교적 잘 돌아가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ㅡ캐나다나 대부분의 서구 유럽 등. 따라서 우리가 가진 이데올로기의 근본적인 것을 건드리는 topic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불가능한 일을 열망하고 추진한다는 비난ㅡ가령, 모든 사유재산을 폐지하자는 등의ㅡ을 받지 않아도 되는 겁니다. 이것은 그렇게 급진적 좌파의 이상이 아닙니다. 해결 할 수 있는 것이고, 또 비교적 성공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내 생각입니다. 이슈를 조심스럽게 선택하라는 말입니다. 공공의 논쟁을 고무시키고 촉진시킬 수 있는 이슈를 조심스럽게 선택하라는 말입니다. 나쁜 의미에서 유토피아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지 않아도 되는 이슈들 말입니다.”(지젝과의 인터뷰, http://youtu.be/IgR6uaVqWsQ)

그런데 그가 이렇게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현실적 대안을 열렬히 외치고 있는 가운데, 혹은 외치기도 전에, 다시 말해 그의 훌륭한 설교가 화면에 나오기도 전에, 클릭을 하는 순간 마치 입구에서 요금을 받듯이, 그리고 설교가 진행되고 있는 도중에, 화면의 전체와 부분 여기저기에는 감각적이고 행동적인 동적 영상으로 이루어진 광고가 현란하게 떠다니거나 혹은 조용히 과묵하게 떠있다. 이것이 자본주의이다. 체계의 중력이 행동을 붙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팔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사유를 방해하는 감각적 폭력이 우리를 산만하게 만든다. 광고와 비판 중 어느 쪽이 더 손해일까? 어느 쪽이 더 홀가분할까? 또는 광고를 이용한 비판일까? 아니면 비판을 이용한 광고일까? 사유가 현실과 무의식적으로 맺고 있는 이 필연적 괴리를 볼 때, 문제는 행동이 아니라 사유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행동하지 말라, 생각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