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떼

베리떼

영화 <아이들>은 “팩트(fact)는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밑바닥에 품고 있는 작품이다. 문제는 팩트가 모호하다는 점 때문이다. 시체 옆에 칼을 든 남자가 서 있다. 그는 죽이기 위해 칼을 찌른 후인가? 아니면 살리기 위해 찔려 있는 칼을 뺀 것인가? 더우기 팩트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개입하고 간섭하여 그 자체가 혼탁하기까지 하다. 팩트는 인용되는 순간 비밀스러운 주관성 안에 닫혀 버려 헤어나오기 어려운 기나긴 당파적 모순에 휘말리고 만다. 법정은 이 모순 속에서 팩트를 건져내어 진리의 객관성을 회복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 모순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결투의 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팩트는 기억이라느니, 필요라느니, 욕망이라느니 하는 식의 진부하고 지난한 화두들이 등장한다. 진술의 하나인 “이것이 팩트다!”는 중립적인 보고나 기술이 아니라, 듣기 부담스러우리만큼 격렬한 ‘자기 변론의 표현’처럼 보인다. 우리는 보고자 하는 것만 보려고 하고, 말하고자 하는 것만 말하려고 한다. 결국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의지’라고 하는 어정쩡한 진리로 귀결될 뿐이다.

팩트의 “실상”에 도달하기 위해, 쉽게 말해, 칼을 든 저 남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전’과 ‘이후’, 즉 ‘시간’이다. 이것이 바로 2차 대전후 유럽의 영화감독들이 그토록 고민했던 “베리떼(vérité)”의 최종 종착지가 “시간”이었던 이유일 것이다. 따라서 시간을 제거할수록 베리떼는 물건너 간다. 그리고 그 균열 사이에서 “폭력”이라고 하는 듣기도 싫은 단어가 탄생한다.

영화 <아이들>에서는 살인보다도 더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폭력이 등장한다: 속단!

이 영화에서는 속단의 두 가지 형태 혹은 동기가 제시된다. 하나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끼워맞추기식 속단이 그것이고(교수가 대변하는). 다른 하나는 필요(욕망)에서 비롯되는 선택식 속단(PD가 대변하는)이 그것이다. 믿음이든 필요든, 아니면 그 어떤 다른 정념이든, 이 둘은 실상을 보려는 욕망이 아니라, 보고싶고, 봐야만 하는 것을 욕망한다. 모호성의 근원적 환경인 리얼리티의 다양성은 “상식”이라는 빠져나오기 어려운 무지 아래, “확신”이라는 저열한 의기양양 아래 무식하기 그지없이 왜곡된다. 영화의 나중에 가서—실상이란 항상 나중에 나온다—밝혀지게 되는 그 전화통화, 즉 아들로 추정되는 목소리와 어머니의 전화통화에서 보듯이, 실상은 많은 경우 우리가 상식적이라고 믿었던 곳이 전혀 아닌 곳에 속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 Nolan)의 <메멘토>(Memento)는 시간을 잃어버린 영혼이 어떻게 끔찍한 불행의 가해자이자 희생자가 될 수 있는지를 강변하는 영화이다. 기억 상실의 주인공은 팩트를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메모를 한다. 그러나 메모가 많아질수록 최초의 팩트는 흐르는 물질의 순간들처럼 소멸해 버린다. 자신의 단편적인 메모들이 상실한 시간을 되돌려 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파편으로 부서진 순간들을 끈적거리는 삶의 힘으로 접합할 능력을 잃은 백치가 되어버린 그는 결국 팩트의 무한한 반복, 병든 반복 속에 갇히고 만다.

어쩌면 지식인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나 정의감이 아니라, 유보시키는 힘, 햄릿과도 같은 우유부단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햄릿의 고뇌를 흔히 우주론적이라고 말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팩트가 환상일지 모른다는 의구심에 사로잡혀 있었던 장본인이다. 어떤 점에서 햄릿은 우리에게 가장 현실적인 인물처럼 보인다. 살인이나 학살 같은 명시적인 폭력보다도, 우리는 실제로 비명시적인 폭력을 일삼는 괴물들에 더 자주 더 깊숙히 더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전과 이후 전체를 보기 위해 보다 더 많은 시간이 요청되는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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