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토프의 몽타주: 물질-눈

베르토프의 몽타주: 물질-눈

에이젠슈테인, 푸도프킨, 도브첸코의 변증법적 몽타주 구성은 각각 ‘파토스’, ‘의식’, ‘추상’이라는 변증성을 추구하는 가운데 서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점은 유물론을 무엇보다도 역사적으로 이해―가령, 혁명이나 민족의 역사적 사건을 통해―한다는 사실이며, “자연이 인간적 총체성 안에 편입되어 있을 때에만 온전히 변증법적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Deleuze, Cinema1, 39) 에이젠슈테인이 자연에 부여했던 이름 ‘무심하지 않은 자연’(non-indifferent Nature)은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보편적 운동 법칙으로서의 변증법은 말하자면 ‘의식의 자기 전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베르토프(Dziga Vertov)는 이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변증성을 정복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그의 독창성은 의식의 변증성을 넘어 “물질 자체 내의 변증성에 대한 긍정”에 있다.(같은책, 39) 다큐멘터리와 뉴스릴을 통해 그가 추구했던 것은 극적이고 인간주의적인 요소들을 배제하고 인간적인 것을 넘어 영속적인 상호작용 속에 있는 물질의 체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단지 물질적 과정의 매개일 뿐이며, 심지어 “매력적인 농부들과 감동을 주는 아이들”조차 모두가 물질적 상호작용 체계 안에 있는 분자적 존재들이다. 이들은 기계의 운동과도 같은 물질의 운동을 주고받으며 “그 속도, 방향, 질서를 변화시키는 촉매이자 변환기”이다. 베르토프가 기계적 구성주의를 지지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기계의 정확함과 지칠줄 모르는 무한한 능력은 부동적 중심에 집착하는 인간적 심리와 지각의 편협과 무능을 넘어설 수단이 될 수 있다. 베르토프가 푸도프킨이나 도브첸코와 같은 자연 묘사를 배제하고, 심지어 에이젠슈테인과 같은 행동적 이미지의 구성조차 거부했던 것은 그것들이 모두가 인간주의적 극화와 감동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몽타주는 현실적 재료들의 기계적 구성의 총체이다: “흥미로운 이미지의 연속을 통해 뽑아낸 운동의 기하학적 추출물이 바로 몽타주가 요구하는 것이다.”(베르토프, <키노-아이> 66)

운동-이미지의 기계적 추출과 구성의 중심에는 ‘간격’(intervals)이라고 하는 베르토프 특유의 이론이 있다. 어떤 점에서 몽타주는 서로 다른 운동-이미지 단편들을 논리적이고 합리적 관계들로 연결하기 보다는, 간격을 벌리고 조정하고 채우고 처리하는 ‘간격의 기술’이다. 말하자면 ‘간격’ 자체가 몽타주의 ‘이면’이자 동시에 ‘근거’인 것이다. 베르그송이 ‘두뇌’를 물질적 상호작용 사이에 개입된 ‘간극’이라고 정의했던 것처럼, 이 빈자리는 인간이 지각을 전유하는 한에서 ‘지각’이며, ‘눈’이며, ‘시선’, 나아가 ‘인간 주체’를 의미한다. 또한 에이젠슈테인, 푸도프킨, 도브첸코에게도 간극은 정신적 계기들로 채워져야 할 빈 곳이다. 그러나 베르토프에게 ‘간격’은 채워져야 할 정신적 빈 공간이나 인간의 지각이 아니라, 운동과 운동의 관계, 방향, 연결, 단절을 엮어 주는 물질적 상호 작용들로 이루어진 ‘물질적 재료’이다. 그것은 인간의 눈이 아니라 카메라의 눈, 물질 안에 있는 눈, 물질의 지각이다. 그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에서는 노동자-기계-신문, 망치질-화력-음식, 카메라-편집-극장과 같은 온갖 종류의 ‘물질적 아상블라주’가 시각적 퍼레이드로 병치된다. 예컨대, 힘차게 흐르는 ‘물의 이미지’와 공장 기계에 실려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신문의 이미지’가 병치된다면, 이 두 이미지는 비유가 아니라 ‘전기’라고 하는 물리적 실체를 통해 상호 관계를 맺으며 연결되는 체계의 항들이 된다. 물은 전기를 발생시키고, 전기는 공장의 프레스기를 가동시키고, 프레스기는 물처럼 흐르는 신문을 생산한다. 마찬가지로 광부의 망치질과 풍성한 식탁의 이미지가 물질적으로 조응하여, 자연과 기계와 인간의 노동 그리고 음식이 정신적으로가 아니라 물질적 과정 속에서 서로 묶인다. 클로즈업이나 슬로우 모션―높이 뛰는 운동선수의 근육, 다이빙 하는 젊은이의 자태, 트랙을 달리는 말의 다리 등―역시 인간적 지각을 넘어서 존재하는 물질적 운동과 변화 과정 안에서의 기계적 포착이다. 베르토프의 몽타주에서 두 개의 연속된 이미지 사이의 거리나 간극은 인간의 지각이 통분하거나 연결할 수 없는 두 이미지들 간의 물질적 상관성을 표시한다: “몽타주는 간격을 물질에 되돌려 주는 것이다.”(베르토프, <키노-아이> 81) 여기서는 오히려 정신성 자체가 물질 외부의 총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는 물질의 상관물로서, 그 변주들과 상호작용 속으로 이행하는 물질 내재적 정신성이다.

어떤 점에서 베르토프의 물질적 편집은 이미지들로 행해지는 단순한 기술적 유희처럼 보일수도 있다. 에이젠슈테인은 베르토프의 이미지가 단지 “형식주의적 광대 짓”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그것은 혁명 이후의 사회에서나 가능한 시도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들뢰즈는 베르토프의 이미지가 해석되어야 할 ‘언술’ 또는 ‘진술’을 갖추고 있다고 강조한다. 비인간적 ‘물질’과 초인적 ‘눈’의 동일성 그리고 이들의 상호 작용이야말로 베르토프의 “세계에 대한 공산주의적 해석”이라는 분명한 정치적 비전이 있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Epicurus)나 스피노자(B. Spinoza)의 자연주의에 비견할 만한 베르토프의 물질주의는 물질의 보편적인 상호 작용에 참여하는 인간 뿐 아니라 실재 전체가 무차별적으로 결합되는 보편적 아상블라주를 함축한다. 베르토프의 ‘키노-아이’(Kino-Eye)가 인간적 지각을 넘어 현실의 물질 내재적 측면을 포착할 때, 그것이 바라보는 현실이란 유물론에 기초한 공산주의적 현실이다. 모든 것은 공산주의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베르토프는 이미지들의 몽타주는 현실의 공산주의적 해석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그는 논문 <남부의 ‘영화인’>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강령의 원칙은 오락이나 이익(우리가 예술을 떠난 이유였던)을 위해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공산주의적 해석이라는 강령에 기초한 전 세계의 국민들과 소련 국민들 간의 영화적 동맹이다.”(<키노-아이>, 120) 혹은 “세계를 공산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강령에 근거하여 모든 민족과 국가의 프롤레타리아 간의 시각적(키노-아이)이고 청각적(라디오-이어)인 계급 동맹을 구축하는 것ㅡ이것이 우리의 목표이다.”(같은 책, 140 이하)

사회의 부당함과 권력을 폭로하고 이에 맞서 투쟁적이고 혁명적인 ‘행위’와 선의의 ‘활동’을 구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인간, 세계, 계급, 국가, 가족, 개인, 사유재산 이전의 그리고 그 이후의 물질성에 기초한 모든 관계들의 실상을 드러내기, 즉 특권적인 중심이 없는 동등한 존재자들의 공산주의적 아쌍블라주의 폭로가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실상의 폭로는 곧 왜곡된 부르주아 세계에 대한 폭로이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계급 없는 사회로 가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동맹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독일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에서 선언했던 ‘개인들의 고착화로부터의 해방’, 즉 각 개인에게 고정적으로 불변하는 지위와 기능을 할당하는 ‘고착화’와 ‘파편화’ 그리고 사회의 경직된 속성으로부터의 해방을 시청각적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각 개인은 다양한 국가적, 지역적 장벽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며, 전 세계의 물질적, 지적 생산품과 실질적으로 연결될 것이며, 온 세상(인간의 창조물)의 갖가지 생산품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는 지위가 될 것이다. [. . .] 지금까지 인간들을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소외시키면서 인간을 지나치게 위압하고 지배해온 이러한 권력들은 의식적으로 지배하고 통제하는 공산주의 혁명에 의해 변화될 것이다.”(Karl Marx and Friedrich Engels. The German Ideology. edited and with an introduction by C. Arthur. New York: 1947. p. 55.) 더 나아가 이것은 근본적으로 물질적 상호관계들―신문이 어떻게 공장의 기계와 연결되는가, 음식이 어떻게 탄광의 노동자와 연관이 있는가 하는 실제적 관계들―을 드러냄으로써, 인간적 지각, 계급의 지각, 개체의 지각을 넘어서는 초인의 지각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 이전의 세계와 미래의 인간의 통일, 즉 작용을 하는 작인(agent)과 작용을 받는 수용자(patient)의 상호 작용 ‘공동체’로 정의된 물질적 우주와 공산주의적 인간의 통일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몽타주 및 가능한 모든 종류의 촬영기법들―슬로우 모션, 가속화, 역전된 동작, 분할화면, 이중인화, 그 밖에 영화 고유의 긴장, 운동, 불일치들―이 쓸모가 있으며, 유희의 광대 짓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의 작품 <제6세계>(A Sixth of the World)에서는 USSR 내의 사람들, 동물들, 산업들, 문화들, 나아가 만물의 상호작용을 ‘공간과 시간을 정복하는 과정’으로 보여준다.

<씨네마톨로지>(근간) 중에서 발췌

 

베르토프의 몽타주: 물질-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