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의 두 체계: 알베르트와 베르테르

에너지의 두 체계: 알베르트와 베르테르

에너지를 수용할 그릇의 크기 때문이든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든, 에너지의 증가가 특정한 한계(긴장)에 이르면, 계속 증가하는 그 에너지의 처리와 소비에 연관된 두 유형의 경제가 등장한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에서 제시된 사랑에 관한 두 관점이 좋은 예이다.

(1) 과잉 에너지를 저장하거나 처리할 다른 신체나 장소를 물색하는 경우: 알베르트(Albert)의 관점에서 볼 때, 열정이 과도하게 넘쳐 생명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면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베르테르의 처리방식은 남아도는 에너지의 포기에 불과하다. 알베르트는 이것을 “현실도피” 혹은 “비겁함”이라고 단정한다. 그에 따르면 열정과 에너지는 계속 축적되고 보존되어야 한다. 이것이 삶이다. 생활의 지속을 위해 생명체는 에너지를 중단없이 쌓아 놓고, 조금씩 절약하고, 더 많은 에너지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 이 “삶의 경제”에서는 축적되는 에너지를 담을 장소를 위해 새로운 다른 존재들이 필요해 진다. 로테(Lotte), 가족, 동업자, 사업,… 알베르트에게 삶의 모든 국면들은 소유로 귀결된다. 따라서 그는 언제나 에너지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언어(제도, 계약, 가족, 결혼) 속에서 말을 한다.

(2) 과잉 에너지를 아무런 조건이나 유보없이 낭비해 버리는 경우: 베르테르(Werther)는 알베르트와의 자살에 관한 한 논쟁에서, 알베르트가 자살을 비겁함이라고 간주한 것에 대해, 이 두 번째 방식,즉 “낭비의 경제”를 설명하면서 응수한다. 신체가 노쇠해져 더 이상 에너지를 수용할 수 없거나 가용 에너지로 변형할 수 없을 때 생명체는 해체되거나 죽어버리듯이, 열정이 극단적인 상태에 이르러 더 이상 이 열정을 감당할 수 없으면, 우리의 정신은 죽음을 선택한다. 따라서 사랑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에게 비겁자! 라고 비난을 하거나, 시간이 해결해 줄거야! 라고 위로하는 일은 터무니없고 쓸데없는 짓이다. 비난과 위로는 모든 기력을 소진하여 더 이상 자신을 유지할 수 없어 죽음에 직면한 노인에게 비겁자! 라고 말하거나 혹은 시간이 해결해 줄 테니 그만 일어나시오! 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결국 점점 팽창하는 베르테르의 열정은 감당할 수 없는 초과에 이르게 되고, 베르테르는 이 경제의 가장 급진적 형태인 육체의 파열을 선택한다: 열정을 대기중에 흩뿌리듯이, 그는 에너지의 절대적 자유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에너지를 처리하고 소비하는 두 체계가 있다. “한편에는 부르주아의 포획경제가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분산적이고 낭비하고 광란하는 변태적 경제가 있다”(Roland Barthes. A Lover’s Discourse: Fragments. eng. trans by Richard Howard. New York, Hill and Wang, 1999. p.85). 이들 두 체계는 아름다움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내리는데, 한쪽은 아름다움을 소유와 관련시키고, 다른 한 쪽은 그것을 죽음과 관련시킨다. 말하자면 한 편은 죽음을 부정하고, 다른 편은 죽음을 긍정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 상반된 두 입장은 다소 아이러니하다(베르테르가 법조인이라는 사실도 만만치 않게 아이러니하고, 베르테르 같은 남자를 따라가는 여자는 별로 없다는 사실도 아이러니 하지만). 괴테가 베르테르를 통해 주장한 자살론이 당시 젊은이들에게 유행(연미복이나 자살의 유행)이 되어 많은 희생자들을 낳게 한 원인이라고 영국의 한 주교로부터 비난받았을 때, 괴테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응수한다: “당신들의 경제 체제는 수천 수만의 희생자들을 필요로 하는데, 베르테르와 같은 젊은이 몇 명의 죽음쯤이야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에너지의 두 체계: 알베르트와 베르테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