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원

동물원

어린시절에 처음으로 동물원에 가서 놀랐던 것은 “잠재적인 것”(the virtuial)이 지각과 의식으로 난입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림 책을 보거나 우화집을 읽을 때 조차, 동물 뿐 아니라 세상 모든 것들을 몽유병자처럼 지각했다. 그것들은 부피도 없고 잔주름도 없이 깔끔하고 살균된 이미지로 2차원적 상상의 대상들이었다. 동물원에 오자 그 “환영지대”(phantom zone)의 이미지들이 창문을 부수고 나온다. 육체라고 하는 것, 더 정확히 말해 “잠재적 지속”(virtual duration)이라고 하는 막대한 어떤 것이 내 앞에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백 년도 훨씬 넘은 거북의 뱃살에 새겨진 정신착란적 찰과상들, 슬로우 모션 영화를 보는 것같이 우아하기 그지없는 기린의 걸음, 엄청난 체적으로 시야를 압도하는 코끼리의 뒷다리, 송곳니를 드러내며 나를 노려보는 늑대나 사자 같은 야수들, … 그들은 정말로 동물이자 괴물이었다. 그들은 내가 가져왔던 지각의 패턴을 흩트려 놓았다. 어린시절의 동물원은 말하자면 지각의 외출이었다. 실재에 대한 불안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던 것도 그 때였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일상적 지각이나 믿음에 대한 어렴풋한 권태가 밀려온 것도 그 때였던 것 같다. 그 후로 나는 아주 오랫동안 동물원에 가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그 권태와 불안은 점차 잊혀져 갔다.

다 커서 동물원에 갔을 때는 지각의 흐트러짐 조차 또 하나의 지각이 되어가고 있음을 실감했다. 늙어가는 동물들을 바라보며, 어쩐지 저것들이 자신들을 바라보는 존재를 닮아가는 것 같았고, 한참이나 바라보던 나 또한 그 사실이 그다지 놀랍지가 않았던 것이다. “레드 피터”(Red Peter)처럼, 살기 위해, 본인은 “잠시 동안만!” 이라고 매 순간 다짐하면서도 실은 평생동안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창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와 거친소리로 식식대며 좌-우로 배회하는 일조차 없다. 간혹 아프리카 초원이나 남미 정글에서 새로 구입되어 막 갇힌 동물들만이 새 우리에 익숙해지기 위해 창살 쪽에서 이리저리 배회하면서 방문객들의 시선을 잠깐 끌고 있을 뿐이다. 다른 동물들처럼 그들도 곧 창살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눈에 띄지 않는 그늘이나 어두운 동굴에 엎드려 잠이 들어 있거나, 관리인이 던져놓아 한참 동안 바닥에 나뒹굴던 김빠진 먹이를 뜯게 될 것이다. 그들은 먹이로부터 초연하기까지 하다. 구경거리를 기대하던 방문객들이 동요를 일으키기 위해 이리저리 소리를 질러가며 약을 올리지만, 동물들은 오히려 더욱 더 인간다운 모습으로 하품을 해댄다. 누구의 창살이고 누구의 구경거리인지 분간이 안 된다.

누구의 것이든, 거기서는 그 무엇도 흥미를 끌지 못했고, 모든 것이 아무래도 상관없는 관심밖의 일인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동물원에 가는 것은 바로 그러한 상태를 기대하고, 변하지 않는 진리를 확인하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동물원은 오래 전에 떠나온 낙원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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